[편집인 주]
1월 20일, 어느덧 날짜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남긴 용산참사를 우리의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국가의 폭력으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죽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6년이 흘렀다. 억울하게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구속 철거민들이 감옥에서 보낸 서러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책임을 묻기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그래서 밝혀야 할 진실의 과제가 무엇인지 5회에 걸쳐 짚어줄 것이다.
허허벌판인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몇 명이 기억할까. ‘용산참사’라는 고유명사는 들어봤지만 ‘여기가 거기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아직도 6년째 개발 중일 뿐이다.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복판 한강로 대로변, 남일당 건물에서 망루 농성 중이던 철거민 5명과 진압 경찰 한명이 사망했다. 거대한 화재와 함께 사라졌다. 참사 이후 검찰은 철거민만 기소했고 그들은 4년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경찰 특공대 1명의 사망사건에 대한 재판만 있었고 아직 철거민 5명 사망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정당한 공무집행이기 때문에 기소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다. 대법원은 2010년 11월 11일 기소 철거민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약 1년 10개월 만에 사법부의 최종 확정 판결로 용산참사 진실은 묻혔다. 그런데 그게 끝일 수 있을까?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는 것이 없다. 대법원이 끝났다 한들, 진실이 밝혀졌다고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려고 한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누가 그들을 죽였고 누가 그들 죽음의 진실을 은폐했는가…” 참사와 재난이 반복되는 한국 사회에서 1월 20일 화재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처럼. 원인도 밝힐 수 없고, 진실도 알 수 없다면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슬픔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이대로 비탄을 기다리면 되는지 물어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6년 전 사건을 다시 들춘다. 먼지 덮인 서류들을 새로 읽었고 참사의 증인들을 만났다. 뚜벅뚜벅 참사의 새벽으로 걸어 들어간 걸음은 6년 전 그때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진실의 물꼬를 틀 수 있다면 기꺼이 정면으로 마주하려고 한다. 의혹의 첫 출발은 참사를 지휘한 배후는 누구였으며, 그들은 책임졌는지 물어 보려 한다.
첫째 청와대는 몰랐는가
집권 초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선택은 공권력을 통한 강제 진압이었다. 법질서 확립을 주장하며 ‘무관용 원칙’을 천명하고 ‘합법보장·불법필벌’을 강조했다. 이런 과정에서 집권 2년차 이명박 정부는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를 차기 경찰청장 후보자로 내정했다. 다음날 2009년 1월 19일 전철연 소속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전철연 회원들이 한강대로변의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옥상에 망루를 지으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권의 법질서 확립이라는 대원칙에 대한 정면도전 행위였다. 청와대로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원칙에 도전하는 전철연의 농성을 좌시할 수 없었고,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로서도 이를 조기에 진압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망루 농성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기도 전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는 조기 강제진압 계획이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농성 철거민들과 대화나 협상은 추진 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찰력을 투입한 강제진압에 들어갔다.
쌍용차 진압, 청와대 직접보고 그렇다면 용산참사는?
2009년 8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 진압과 관련해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2012년 9월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이 강제진압에 반대하자 “대통령께 직보 해, 허락받았다”고 밝혔다. 쌍용자동차와 관련한 강제진압은 청와대에 직접 보고해 허락 받을 정도의 중대한 사안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은 다를까? 평택에서 노동자들의 공장안 농성을 진입하는데 청와대가 개입했다면, 서울 도심 한복판 농성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서슬 퍼런 집권 2년차를 앞두고 있었다.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매우 서툰 진압 전 과정, 집회시위진압 매뉴얼에도 어긋나는 진압…이것이 과연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와 경찰 자체 판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청와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하지 않았을까? 검찰 수사본부는 청와대의 개입설은 아예 수사대상에도 포함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왜 군포연쇄살인사건으로 용산참사를 덮으려 했을까?
2009년 1월 24일,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강호순이 검거되자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사건 보도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곧 청와대가 언론사들에 이메일로 보도 지시했음이 드러났다. 부인하던 청와대는 ‘보도지침’ 내용이 공개되자 이를 시인하고, 이메일 보낸 것으로 확인된 청와대 행정관을 해임했다. 이메일에는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라는 내용들이 있었다. 이 신종 보도지침 사건은 국회에서 잠깐 따지다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이라도 다시 짚어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청와대 행정관 외에 책임질 윗선이 없다는 것인가?
째, “김석기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든 현장 상황을 총괄하고 있었다”
참사 당시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는 검찰에 제출한 '사실관계 확인서'에서 "사건 당시 서울경찰청 집무실에 있었으며, 진압 작전 전후 휴대전화를 통해 보고받았을 뿐 실시간으로 직접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은 서면 질의서를 보내 무전 지시를 들었는지에 대해 "무전기는 있었지만 안 켜 놨다"고 답변서를 받았다. 무전기 전원을 켜 놓았는지 유무에 대해서는 추측할 부분이 아니라 객관적 자료로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며 결론적으로 "관련 로그자료 기록이 확보되지 않아 사실 관계를 알 수 없다"고 발표했다. 참사 초기 김석기 내정자가 현장에 있었는지, 현장의 상황을 지휘했는지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검찰은 김석기 내정자를 단 한 번도 소환조사하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보고만 받았지 승인하지 않았다”(김석기 국회 답변)로 결론 내렸다. 참사 발생 1년이 지난 2010년 2월경 국가인권위는 "용산참사에 대한 경찰력 행사는 위법했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국가에 의한 범죄행위의 불처벌' 현상이 발생하고 법치주의에 심대한 장애가 발생한다"며 엄중한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단 한명의 경찰도 책임 지지 않았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1조 제2항의 경찰비례원칙에 어긋나는 경찰권 행사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른 정당한 직무집행이라고 할 수 없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 위반된 다수 사안에 대해 대법원 등은 경찰관의 공무집행 위법성, 과실 등을 인정하여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용산참사는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경찰의 위법한 과잉 진압이 주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철거민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죄(설득과 대화과정 생략, 경찰특공대 투입요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찰력 투입으로 극단적 상황을 초래, 화재발생 물질 완전 소진 전 진압, 유류화재에 대한 미대책, 안전매트 등 안전장비 구비 없는 등 진압과정 안전조치 미실행)가 성립한다. 또한 경찰은 업무상 중대한 과실에 책임이 있다. 진압시 안전수칙 및 고도 주의 의무 위반 책임이 있다. 사망 등에 대한 예견 가능성 및 사망과 주의의무 위반 등의 상당인과관계가 존재 했다. 그러나 검찰은 모든 경찰책임자에 대해 무혐의로, 법원은 재정신청에 대해 기각함으로써 경찰의 법적 책임을 면책했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한다.
김석기는 현장의 상황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하지 않으려던 3000천 쪽 기록 속에는 참사당시 무전녹취 대화가 누구의 것인지 드러난다. 사건 초기 확보된 경찰 무전녹취록의 대화와 현장 지휘부의 무선 내용은 누구의 대화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추가 수사기록을 보면 검찰의 경찰지휘부 신문내용과 무전녹취록 교차 비교로 무전 대화 나눈 이들이 일부 확인된다.
1월 20일 작전 당시 경찰 지휘부 위치를 보면, 용산 현장에는 김수정 서울청 차장 등이 있었다. 서울청에는 이송범 서울청 경비부장과 김원준 경비1과장이 경비계 상황실에 위치하면서 상황에 대한 총괄 지휘를 하고 있다. 상황실 옆방은 김석기 집무실이었다. 이송범은 진술조서에서 중요한 작전변경을 김원준 경비과장 혼자 했다고 진술한다. 김원준 경비과장 역시 “제 개인적으로 판단해서 용산경비과장에게 지시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김수정 서울경찰청 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과장이 단독으로 작전 변경을 지시했던 것이다. 심지어 작전변경은 근본적 변경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당시 김석기 내정자는 사건 지휘 책임이 없음을 ‘무전기를 꺼 놓았다’는 납득할 수 없는 해명으로 회피했다. 진압 지휘 책임자 모두 법적 책임을 면책 받은 지금, 김석기 지휘책임을 묻는 것이 의미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초기에 김석기의 지휘 책임 추론이 가능한 이 상황이 밝혀졌다면, 어떠했을까. 정말 재판은 철거민들 책임만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무리하고 위험한 강제진압 책임을 진 경찰이 단 한명도 없는 상황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여전히 김석기 당시 내정자가 참사 당시 상황을 지휘했는지 여부는 중요한 쟁점이다. 현재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김석기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참사의 책임자가 낙하산으로 정부기관에 버젓이 취임하고, 참사 이후 6년 동안 국가는 단 한명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반성하지 않는 국가 폭력 악순환은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새롭게 용산참사 진상규명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발견한, 여전한 핵심은 그것이었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 진압이 아니고 구조였다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글은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공동 게재됩니다.
덧붙임
박진 님은 용산참사진상조사단에서 활동했으며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