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IMF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자정 무렵, 서울역 지하도에서 말로만 듣던 노숙자들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들은 분리수거도 되지 않은 채 부패해 가고 있는 거대한 쓰레기더미 같아 보였다. 국가와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안쓰러움, 분노, 자괴감의 복잡한 감정이 일었던 기억이 있다.
그 노숙자들이 아직 여전하긴 하지만, 지금의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실직비관 50대 회사원 아파트에서 추락사', '카드 빚 비관 30대 자살', '남편 빚에 시달리다 자살', '사업부진·생활고 비관 30대 주부 목매 자살' 등 생활고로 인한 자살 소식들이 7, 8월 내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카드 빚에 시달리던 30대 주부가 자녀 3명을 아파트에서 떨어뜨린 후 자신도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에 이르러서는 현 체제와 생존권의 관련성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생활고, 사업 실패에 따른 자살은 786건이었지만, 2001년 844건, 2002년 968건 등 해마다 큰 폭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 원인별 순위가 예년에는 비관, 병고, 가정불화, 정신이상, 빈곤이던 것이 올해는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 3위로 올라섰다.
빈곤으로 인한 자살의 증가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있는 일본의 예는 더욱 심각하다. 일본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경제·생활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전체 자살의 약 25%나 되고, 일본 자본주의의 과잉축적 위기에다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겹쳐 불황이 더욱 심해진 지난 98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급증해 그전까지 2∼3천명 선에 이르던 것이 98년에는 단번에 6천명 선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난해 경제·생활문제로 자살한 일본인은 전년보다 1,095명이 늘어난 7,940명으로, 경찰의 자살자 집계가 시작된 지난 1978년 이후 처음으로 7천명 대를 넘어섰다. 전체 인구로 보면 한국의 3배 정도인 일본에서 경제·생활문제로 인한 자살인구는 한국의 10배에 이르고 있다.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이 수치는 9.11 테러로 인해 미국 무역센터가 붕괴되면서 죽은 사람의 두 배에 이르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인한 이라크인 인명 손실의 수배에 이른다.
한편 이와 같은 자살통계는 현재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의 세계 각국 민중들의 고통에 찬 삶의 모습 중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기아임금,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장시간 노동, 중대 재해, 실업, 그리고 인간적인 모멸로 고통받는 (여성)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빚에 쪼들리는 소농과 빈민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영양결핍, 질병에 신음하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경제적 문제로 가정불화를 겪고 이혼하는 부부와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생존의 경계 안에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 중 일부에게 체제는 어느 순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생존권을 박탈한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 또는 '체제살인'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한국에서의 빈곤의 상징이 7-80년대에는 판자촌과 달동네였다면, 90년대에는 노숙자였다가, 2000년대는 생활고로 인한 자살 또는 체제살인으로 그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에 달할 2010년대 한국에서의 빈곤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박하순 님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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