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폐암 치료제 '이레사', 제2의 글리벡 사태 되풀이
말기 폐암환자들을 위한 획기적인 치료제가 나왔는데도 환자들이 비싼 약값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있다.
지난해 7월부터 국내에 시판되고 있는 '이레사'는 비소세포성 폐암환자가 기존의 화학요법에 모두 실패했을 경우 최후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로 개발된 의약품이다. 말기 폐암환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의 적정 가격 결정이 반년이 넘게 미뤄지고 있는 사이, 이 약의 특허권자인 다국적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가 정한 임시 판매가격이 한 알 당 약 8만원에 달해 환자들이 한달 평균 240여 만원이나 지출해야 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가격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보험마저 적용되지 않아 고스란히 환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
직장을 다닐 수도 없고 비싼 치료비로 가족의 생계조차 위협받고 있는 말기 폐암환자들에게 약값으로 한달에 240여 만원을 지급하라는 것은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에 27일 건강세상네트워크, 암환자살리기운동본부, 약국노조(준),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은 아스트라제네카 한국지사 건물 근처에서 "이윤보다 생명!"을 외치며 고액의 약값 책정을 강력 규탄했다.
암투병 중에 이 자리에 어렵게 참석한 박용담 씨는 "1년에 항암 치료비가 1천5백만-2천만원에 달한다"며 시각을 다투며 암과 투병하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이레사의 합리적인 가격 인하와 건강보험의 조속한 적용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강주성 공동대표는 "누구나 암환자 혹은 그 가족의 입장에 처할 수 있다"며 이레사 가격의 문제가 일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했다. 실제로 1997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폐암은 우리 나라의 성인 남자에게 발생하는 전체 암 가운데 세 번째로 높은 발생률을 보이고, 암으로 인한 사망 중에서도 세 번째로 높은 사망률을 기록, AIDS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한달 평균 240여 만원에 이르는 약값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들 몫으로 남겨져 있다. 보건의료단체들과 환자와 그 가족들이 이윤만을 앞세운 채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흥정하고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측을 규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트라제네카 측은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약값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보건복지부가 약값을 결정하는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혁신적 신약'의 약값에 대해서 'OECD 선진 7개국의 공장출하가'를 기준으로 약값을 결정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1999년 미국이 요구한 것을 한국 정부가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생긴 제도이다. '암환자 가족을 사랑하는 시민연대' 박정묵 씨는 "우리나라보다 GDP 수준이 몇 배나 높은 국가의 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이레사의 적정 가격은 "현재의 30% 수준인 2만4천원 이하가 되는 게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30일로 예정된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이레사의 적정 가격을 6만5천원 정도로 결정할 것으로 알려져, 정부가 국민의 건강권은 외면한 채 다국적 기업의 독점적 이윤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기적의 백혈병 치료제로 불리기도 했던 글리벡이 비싼 약값 때문에 환자들에게 절망의 약이 되었듯이, 말기 폐암환자 역시 이레사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