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문제를 청산하겠다는 흐름이 정치권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국정원을 필두로 하여 과거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정치공작을 자행했던 기관들이 스스로 과거를 고백하기 위한 기구들을 만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저런 한계를 미리부터 설정하려는 의도들이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다. 과거청산을 한낱 역사학자들의 연구작업으로만 한정하려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이를 주도하는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입장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부터 책임자 처벌을 제외한다고 하면 뭔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미 유엔을 비롯한 국제인권기구들은 과거청산을 불처벌(impunity)이란 개념으로 정리해 왔으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 거의 무제한적인 원상회복 조처와 국가의 기억의무까지 포함하는 배상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진실을 규명한 뒤 그 경중에 따라 처벌을 논하는 것은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하기 위해 당연하게 밟아야 할 수순이다.
또한 정부는 '반인도적범죄에관한공소시효부적용조약'에 가입하고, 반인권적인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특별법 제정은 같이 추진해야 한다. '공소시효'라는 안전판 뒤로 학살과 고문의 가해자들이 숨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일은 1백년도 넘는 근·현대사를 청산하겠다는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과거 청산의 대상을 인권유린 사건, 정치의혹 사건 등 개별적인 의혹사건으로 한정해서도 안 된다. 개별 의혹 사건이 발생하도록 한 당시 국가의 시스템과 기구, 법제의 문제는 없었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가령 90년대까지 이어져왔던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규명할 때 '강기훈 유서대필사건'과 같은 의혹사건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달려나오게 된다.
과거청산은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 괜히 진실의 언저리만 건드리다 말 것이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의 한은 더 깊어지고, 기득권 세력은 더욱 기고만장해질 것이다. 미리부터 과거청산의 한계를 긋지 말라.
- 2649호
- 200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