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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참사 500일, 이제'라도' 인권할 시간

지난 7월 11일, 천도교 수운회관에서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 추진단 전체회의가 열렸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을 포함해, 4.16인권선언을 함께 만들어가는 풀뿌리토론의 취지에 공감하는 추진위원들이 전국에서 200여 명 모였다. 추진단에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인권선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함께 하고 싶어 참여한 시민들도 많았다. 200여 명이 원탁에 나눠 앉아 벌이는 토론은 그 광경만으로도 희망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세월호 참사로 무너져내린 사회와 침몰해버린 인간의 존엄을 함께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와 역량은 무너지지도 침몰하지도 않았고 어디에선가 함께 할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체회의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는 전국 곳곳에서 펼칠 풀뿌리토론의 기본 프로그램을 추진위원들이 직접 시작해보는 시간이었고, 2부는 앞으로 인권선언을 추진하는 과정에 대한 여러 의견을 듣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고 다양한 고민들이 제출되었다. 그 중 하나는,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는 것이 인양이나 진상규명과 같은 과제들을 접거나 가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조금은 당혹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 인권할 시간"이라는 전체회의 웹포스터의 제목을 놓고 "지금이 인권할 때냐"는 항의가 이미 있었던 터다. 인양이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과 같은 과제들이 모두 인권을 근거로 주장되는 것이고, 인권선언운동은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이유와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그리 직관적으로 가닿지 않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좌)200여 명의 참여자들이 모둠을 나누어 풀뿌리토론을 진행하였다. (우)참여자들이 다함께 인권선언 추진을 다짐하는 글을 낭독하였다.

▲ (좌)200여 명의 참여자들이 모둠을 나누어 풀뿌리토론을 진행하였다. (우)참여자들이 다함께 인권선언 추진을 다짐하는 글을 낭독하였다.


죽게 내버려둔 것은 범죄가 아닌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 앞에서 '생명에 대한 권리'라는 말이 무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인권침해 사건으로 잘 여겨지지 않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하다. 죽임과 죽음 사이의 차이가 그것이다. 국가범죄는 인권에 대한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5.18광주민중항쟁과 같은 사건을 국가범죄로 인식하고, 심각하며 중대한 인권침해로 바라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생명과 안전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구조하지 않음' 또는 '구조하지 못함'이라는 부작위는 인권의 침해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국가의 '무능'으로만 설명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무능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인 침몰이나 방치와 같은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누구도 이와 같은 의혹을 기각할 권한은 없다. 그러나 음모가 없었다면 우리가 목격한 무능은 죄가 없는 것인가?

2014년 4월 15일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목적지에 닿기 전 공포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배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운항을 맡고 있던 선장이나 선원들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고 탑승객들끼리 불안을 겪어야 했다. 한 학생이 구조 구난 요청을 했으나 위도와 경도를 말하라는 요구만 받았을 뿐이다. 해상 안전을 관리하는 관제센터 역시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침몰 사고 발생이 분명해지고 해경이 구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경비정은 탑승객들에게 퇴선명령을 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선장과 선원들만 싣고 세월호를 버렸다.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건 현장에서 탑승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만 받았으며, 구조의 책임이 있는 해경조차도 탑승객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다. 탈출해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손끝에서 지켜봐야 하는 생사의 현장이었다.

어떤 이유로 사고가 발생했든 근대 국가는 구성원의 생명을 지켜낼 책임이 있다. 재난대응체계를 수립하고 구조 인력과 장비를 마련하고 구조 구난 훈련을 실시하는 등은 국가의 기본적 역할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현장에서는 구조를 지원하겠다는 중앙119, 미군, 해군 등의 조력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재난대응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난구조업무를 민간에 위탁시키고(2012) 연안 구조 장비 예산을 절감하고 재난구조 인프라나 구조 전담인력 확충에는 거의 예산을 사용하지 않았다. 국가는 체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무능을 만들어왔다.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무능이라면, 그것은 범죄와 다를 바 없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는 국가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

책임을 묻는 것은 권리를 재확인하는 것

정부는 해경123정장을 책임자로 법정에 세웠다. 해경123정장은 과실치사상죄로 감옥에 갇혔다. 광주고등법원은 “피고인을 현장지휘관으로 지정한 후에도 (...) 피고인으로 하여금 구조활동에 전념하기 어렵게 하였으며, 평소 해경들에게 조난사고에 대한 교육훈련을 소홀히 하는 등 해경 지휘부나 사고 현장에 같이 충돌한 해경들에게도 승객 구조 소홀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으므로, 피고인에게만 피해자들의 사망, 상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가혹한 점”을 들어 약한 형을 선고했다.(2015.7.14) 그러나 아무런 지휘를 하지 않았던 목포해양경찰서장, 서해지방경찰청장은 법정에 서지도 않았다. 재난 컨트롤타워인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제대로 된 보고도, 지시도 하지 않았으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국가안보실장을 그만두었던 김장수는 주중대사의 자리를 얻어 국가의 녹을 먹고 있다. 해경123정장에게만 묻기 어렵다며 책임을 분산시켰으나, 책임은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려내지 못했고, 여전히 시신조차 찾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 죽어버린 생명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우리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지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는 그런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부는 그런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지가 없다. 죽게 내버려둔 것이 의지가 아니라 너무나 안타까운 우연의 연속이었더라도 이렇게 무책임할 수는 없다. 수백 명을 태운 여객선이 육지에서 멀지도 않은 곳에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데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선장과 해경123정장의 퇴선 명령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인명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신속하고 효율적인 구조를 위한 대응체계를 만들고 운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드물지 않은 여객선 침몰 사고가 국가적 참사가 되도록 청와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기며 등장했던 국정원은 어디쯤에서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밝혀야 할 질문들은 모두 무시되고 있다.

차일피일 미루고, 진행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리지도 않은 채 진행 중인 인양도 마찬가지다. 세월호로부터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가 나온 이후 세월호 탑승객들의 운명은 국가 책임 아래 있었다. 해난사고의 구조 임무가 국가에 있으므로 구조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수습하지 못한 것 역시 국가 책임의 연장선에 있다. 이미 죽었더라도 바닷속에 갇힌 미수습자들에게는 가족을 만날 권리가 있다. 그/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수습자 가족들에 대한 인권침해이기도 하다. 죽음을 확인할 기회조차 빼앗아버린 정부는 하루하루 길어지는 미수습의 시간만큼 자신의 책임이 커지는 것을 깨닫고 먼저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구조하지 않음으로써 사망한 사건의 연장선에 미수습 상태가 있다. 수습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당연히 이것까지 다뤄야 한다. 왜 구조하지 못했는지 뿐만 아니라 대규모 수색 작전 중이라는 왜곡보도만 내보낸 채 충분히 수색하지 못했는지도 말이다.

참사 당시에도, 참사 이전부터, 그리고 참사 이후로도 정부는 무권리의 상태를 음모하고 있다. 아직 가족을 만나지 못한 미수습자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 아직 온전하게 기억되고 애도되지 못하는 죽음들, 아직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와 지속되는 고통, 아직 기약되지 않는 안전... 참사는 끝나지 못하고 이어진다. 이 모든 상황이 아직 우리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따지는 것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권리를 비롯한 피해자의 권리와, 말하고 모이고 행동할 우리의 권리 등 인권의 목록이 다시 확인되어야 한다.

현명한 질문에 대한 어리석은 대답

그러나 "지금 인권할 때냐"는 항의 또는 의문에는 현명한 감각이 깃들어 있음을 안다. 이미 헌법이 생명에 대한 권리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명시하고, 유수의 국제인권법들이 인권을 선언하고 권고한다고 인권이 실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인권으로 싸울 이유는 없다. 인양에 대한 권리든, 진실에 대한 권리든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싸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양을 요구하면서 미수습자의 권리를 말하지 않아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진실에 대한 권리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싸울 수 있으며 싸워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고, 책임과 무관한 금전적 보상으로 참사를 서둘러 지우려는 정부의 의도가 분명한데 '인권'하며 앉아있을 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권리를 이렇게 빼앗기는 중에도 그것이 우리의 권리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모두 끝나버린 후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실도 정의도 배상도 피해자의 권리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묵살하거나 거래하려 드는 정부가 가장 반길 말이 "인권은 나중"이라는 말이 아닐까? 국가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찬탈하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 권리를 유보하며 무권리 상태를 존속시키지는 않아야 한다.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제서야 그게 권리라는 걸 알았다"고, 빼앗기고 나서야 절박하게 확인하게 되는 경험을 마음과 머리로라도 먼저 끄덕이며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인권의 선언이 인권의 실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권리들을 가진 주체이며, 그 권리들이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 주권자들임을 밝히는 인권선언은 세월호 참사가 남긴 숙제들에 대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대답이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