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망령을 덧쓴 사법부가 영화를 일방적으로 재단, 통제하여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주범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지난 달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재판장 이태운)은 박정희에 대한 '인격권'을 운운하며 아들 박지만이 낸 영화 <그때 그사람들>(임상수 감독)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수용하여,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에 배치된 실사 장면 일부를 삭제하라고 판결했다.
이 영화는 10.26이라는 현대사의 상징적인 한 페이지를 재구성하여 남성적 권력에 대한 조롱과 일침의 시선이 돋보이는 '창작물'이다. 특히 일반적인 정치 드라마에서 엿보이는 정치적 밀월 관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을 관통했던 사건을 맞아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갔던 이들의 행태를 조명하면서 역사와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법원은 극영화의 앞뒤에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장례식을 찍은 장면으로 짜인 구성을 문제삼아, 영화가 "10 26사건의 실제 상황을 엿보는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법원의 좌불안석은 사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대한 경직된 사고를 바탕으로 창작물을 창작의 결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박정희의 후광을 얻고 있는 핏줄이 제1야당의 총수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권이 휘둘러 온 유혈 정치 덕에 사라져간 숱한 이들의 '인격권'을 그토록 외면해 왔던 사법부의 특별한 총애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사법부가 청산되지 못한 얼룩진 현대사의 잔재를 동력 삼아, 말하려는 자의 입을 틀어막고, 보려는 자, 들으려는 자의 기회를 박탈할 권리를 지닌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표현의 자유는 그 표현물이 사회에 현저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될 때 만 제한될 수 있다"고 인권의 원칙은 말하고 있다. 전쟁을 선동하거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지만 이 경우도 "사회에 현저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어야 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의 제약은 매우 까다로운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하물며 이번 판결은 권력자의 인격권 같은 모호한 규정과 함께 영화가 "10.26 사건의 실제 상황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예술 표현의 문제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제약했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사전심의제도에 반발하여 공식 검열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를 해체하라는 움직임이 90년대 이후에 적극 터져 나왔다. <오! 꿈의 나라>를 제작한 '장산곶매'는 91년 위헌법률제청을 신청하여 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도록 이끄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돌이켜보면 지난 60년 4.19 혁명의 여파로 만들어진 민간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를 무너뜨리고 시나리오와 완성된 필름의 검열을 강제한 박정희 정권 이후 36년 만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었다. 이의 성과로 '공연윤리위원회'는 없어지고,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를 거쳐, 지난 2000년에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 탈바꿈했다.
그렇지만 등급위원회는 제한 상영관이 없는 실정에서 등급보류라는 독소조항을 만들어 내, 등급을 받지 못한 영화들은 관객과 만날 기회를 차단 당했다. 결국 2002년 등급보류 역시 사전 검열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헌재로부터 위헌임을 확인 받았다.
물론 96년 헌재 결정 이후에도 실제적인 사전검열 장치는 잔존했다. 모든 영화들이 등급 부여를 받지 않으면 상영을 할 수 없다는 당시의 현실은 사전검열을 위한 가위질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영화제 상영작 역시 심의의 대상이었는데,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은 <레드헌트>가 사전심의를 거부하자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구속되기도 한 것. 최근에 영화제들에게는 서류 심사의 과정을 거친 후 '등급분류 면제추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이 역시 영화제 측에게 문제시 된 작품을 요구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면제추천을 안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사전검열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영화의 제작사인 MK픽쳐스 측은 지난 2일 법원에 제소명령을 신청한 것과 아울러 일단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세 장면을 삭제하여 개봉을 하고, 이후에 시간을 두고 가처분 이의 신청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최초로 수용한 <그때 그사람들>의 '조건부 상영 결정'은 사전검열이 가능하다는 낡은 사고에 힘을 더해주며 진보적 시계의 태엽장치를 거꾸로 돌린 셈이다. 이후 노근리 학살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일부를 재현하는 영화들의 제작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판결이 하나의 표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검열이라는 잣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좀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한 대목이다.
문화연대, 스크린쿼터 문화 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일 성명서를 통해 "사법부야 말로 그때 그사람들"이라며 "이번 결정을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보안법을 필두로 한 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원천봉쇄 조치는 여전히 서슬 퍼렇게 남아 있고, 노골적으로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영화 산업의 제작 논리는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할 자유를 애초에 거의 허용하지 않고 있다. 넘어서야 할 산은 아직 충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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