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제작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비밀정보기관에 의한 조작과 감시를 통해 인간의 삶이 어떻게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는지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로버트 딘 변호사는 속옷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디스크 하나를 손에 넣게 된다. 이 디스크에는 국가안보국에 의해 한 국회의원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자신의 도청권한 확대를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암살한 국가안보국은 필사적으로 디스크를 되찾으려 한다. 사무실에 앉아 한 속옷 가게에 설치된 CCTV 녹화 내용을 열람한 뒤 딘에게 디스크가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된 국가안보국은 딘의 은행통장을 조회하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도 모자라 사실을 날조해 딘을 해고시키는 등 가공할 만한 위력을 과시한다. 국가안보국의 정보력에는 딘의 집도, 그가 입고 다니는 옷과 손목시계도 벗어나지 못한다.
정보기관에 의한 섬뜩한 감시와 초법적 권한 행사는 단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부터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세계 정보기관들이 걸어가고 있는 공통된 모습이다. 올해 초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서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국가테러리즘이 세계 인권·평화진영의 공통된 우려로 제기된 바 있고, 국내에서도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가 2001년 이후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달 1일에는 대통령 훈령에 근거해 국정원 산하에 테러정보통합센터가 신설, 업무를 시작했다.
정보기관은 '공포'를 먹고 자란다
이러한 가운데 비밀 정보기관들의 추악한 과거와 오늘을 생생하게 고발한 책이 나와 관심을 끈다. 폴 토드와 조너선 블로흐가 공동집필한 『조작된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냉전체제 해체 이후 조직의 유지·존립 근거를 찾지 못해 난감해졌던 정보기관들이 다시금 구체적 실체가 모호한 '테러와의 전쟁'을 앞세워 과거의 '명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낱낱이 파헤친다. 마법의 열쇠는 바로 '날조'와 '공포의 조작'에 있다.
특히 저자들은 9·11 테러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다. 9·11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테러 관련 법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정보기관들에 유례없는 권한을 허용하는 한편, 기존 국제인권조약과 헌법적 권리들을 무력화시키는 법조항들이 대대적으로 도입됐다. 미국은 국토안보부를 신설함과 동시에 불과 24일 만에 애국법을 통과시켜 테러 용의자 조사 권한과 감청대상자의 모든 전화통화에 대한 무제한적 도청 권한을 정보기관에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정보기관의 정보까지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정보기관의 활동이 범유럽적으로 확장됐다. 테러에 대한 공포의 조작 혹은 과장이 정보활동의 세계화 시대를 불러온 것.
감시기술의 확산, 뒷걸음치는 인권
이러한 '감시의 세계화'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첨단 감시기술의 발달이 자리잡고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위성과 에셜론 시스템(미 국가안보국에 의해 기획·조정되는 세계 도청 네트워크)을 이용한 지구적 감시, 인터넷 감시, 음성발화자 인식 시스템 개발 등을 통해 감시와 통제의 그물망이 촘촘해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세계 시민들의 인권과 민주주의에는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 권력'에 시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반세계화 운동과 인권운동, 환경운동 진영도 감시의 주요 표적이 됐다. 고문, 재판 없는 구금 등이 제도적으로 용인되기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초법적 권한을 가진 정보기관에 의한 피해에 대한 입증 책임은 힘없는 일반 시민에게 전가됐다.
제3세계에서는 정보기관이 특정 정치세력의 사적 친위대 역할을 자임하면서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극대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과 다국적기업, 무기거래 산업이 악의 고리처럼 서로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르완다내전 등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학살전쟁의 배후에는 이곳의 자원을 노린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강대국 정보기관이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보·군사활동이 민영화되고 있다는 것. 산업스파이에서부터 사설군대까지 갖춘 다국적 안보기업들이 정보기관의 감시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열어주면서 제3세계 정치와 경제에 깊숙이 관여해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이 부른 비극
정보기관은 정보의 '수집'뿐 아니라 정보의 '왜곡'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의 개시는 정보기관에 의한 정보의 왜곡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불러오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보기이다. 러시아에게는 테러의 위협이 체첸 탄압의 명분을 제공했다. 저자들의 지적처럼, 증거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인 셈이다. 그나마 감시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보기관의 감시에 저항하는 통로도 열리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가려진 권력', 어떻게 통제할까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비판을 넘어 정보기관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다. 정보기관에 대한 공적 통제 시스템을 마련한 나라들의 예는 그만큼 현실적인 상상력을 제공한다. 정보기관에 대한 통제 권한을 외부 감독위원회·프라이버시위원회·인권위원회에 부여한 캐나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독버섯처럼 자라온 악질 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 개혁 조치를 통해 정보기관과 법집행기관을 떼어내고 민간 감독관 제도까지 도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실험이 새로운 비전을 세우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저자들의 믿음이다. 국정원에 여전히 수사권을 허용하고 있는 한국 상황으로서는 뼈아픈 지적이다.
옮긴이의 보론 역시 한국 정보기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만 갖가지 현상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하다보니 한 편의 르포를 보듯 생생하지만, 정작 각장의 핵심 주제의식이 선명히 드러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