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농민이 경찰에 죽임을 당해 보름째 영안실에 있고, 칠순 나이를 바라보는 또 한 명의 농민은 경찰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가운데 세계인권선언 57주년을 맞는다. 오늘날 우리의 인권은 겨우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생존권을 지키자고 여의도 겨울 칼바람 앞에 천막은 늘어만 가고, 절망 끝에 투쟁에 나서는 이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의 행렬이 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을 맞는다. 오늘 어디에선가 인권을 말하는 축하 리셉션이 열릴 것인데, 진정 인권의 주체이고 향유자이어야 할 민중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방황한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칼바람 앞에 온몸을 내맡긴 채….
사람이 죽어가고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데도 세상은 황우석 파동이 몰고 온 국익 노름에 미치고 있다. 33조라는 이윤 창출에만 눈이 어두워 생명의 권리, 여성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눈감은 채 숨어 있던 '애국자'들이 궐기하여 국익을 위해 죽자고 외친다. 황교수의 논문이 거짓이라도 좋고, 조작되었어도 좋다면서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의 한 평 묘소마저 훼손했던 그들은 어제는 사립학교법 개정 저지를 위해 궐기하고, 오늘은 북한 인민의 인권을 미국 패권주의와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외친다. 북한 인민의 인권 문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수단이 되고, 반공적 적대의식과 대결구도만이 자신의 살 길이라고 외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자유의 이름에 값하는 어떤 자기희생도 치룰 생각도 없이….
요즘은 '시위 현장에 머리 하나라도 보태면서' 기록사진을 찍는 작가 조세희 씨는 11월 15일 농민대회 현장에 있었다. 그는 고 전용철 씨와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물대포를 맞았다고 한다. 그는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850만인데도 시위는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는 1001·1002·1003 부대의 무자비함을 증언한다. 민중들의 절박한 생존권 요구는 무자비한 경찰력에 의해 원천 봉쇄당하고, 정부와 국회는 한판 몸싸움 끝에 자신들의 노고를 서로 위로한다. WTO 자유무역협정체계를 실무적으로 완성하려는 홍콩 각료회의에 성과를 내라고 다그치는 아펙정상회의는 '성공적'으로 열렸지만 이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아펙 정상회담 근처에도 못 가고 막혀 버렸다.
오늘 민주주의와 인권은 자본의 자유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춤추는 다수 정치세력들의 담합에 의해 죽어간다. 사대주의와 반공주의로 무장한 수구세력들이 적극적인 행동전으로 나오며 지금까지의 민주화투쟁의 성과를 무력화하는 가운데 군국주의 파시즘의 징후들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상륙했고, 드디어 한국으로 상륙하고 있다. 민주화의 지체로 뒤늦게 과거청산과 자유주의 개혁이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 의해 추동되지만 그 힘도 지지 기반이 너무도 약화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외 다른 경제학을 모르는 이 정권은 경찰을 앞세워 민중들을 억압한다. 시민·정치적 영역의 좀 나아진 자유는 생존권마저 보장하지 못하는 이 정권에 의해 다시 억압받는 상황으로 '되치기' 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와 농민, 빈민이 죽어가면서 외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이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가 올려야 할 인권의 기치는 '평등'이다. 평등 없는 자유는 헛소리임을 오늘 우리는 농민들의 죽음 앞에서 절절히 깨달아야 하지 않은가.
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있어도 그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목숨 걸고 도로를 횡단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고, 단속을 피해 어둔 발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고, 자신의 존재마저 세상에 당당히 내놓지 못하는 이 시대의 두터운 차별구조 앞에서 노동도 건강도 주거도, 아무런 신분상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 자체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다수 힘 있는 자들이 조성한 인권구조의 벽을 깨야 하는 그들이 시시각각 느끼는 절망감은 말해 무엇하랴. 자본이 국가영역을 잠식하여 권력의 자리를 꿰차고,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자본주의 합리화 체제에 포섭되고, 개인의 고유한 정보마저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이 세계화 시대에 자유로울 영혼은 없다. 맘 놓고 안식할 여유는 없다.
참담한 인권유린의 구조 앞에서 하나 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촛불이 켜지고 있다. 그 촛불에 하나의 촛불을 더하고, 그 촛불이 들불이 되는 그런 연대의 꿈, 연대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생존권을 외치는 민중들의 촛불에 소수자의 설움과 외침을 보태자. 이주노동자의 권리도, 장애인의 권리도, 성소수자의 권리도, 빈곤한 세상 모든 약자들은 이 연대의 길에 함께 하자.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내모는 이 광기의 시대에 세계인권선언이 펼쳐 보였던 법의 지배 시대의 종식이 다가오고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살 길은 자유와 평등의 어깨를 거는 연대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강고한 연대, 이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며 오늘 세계인권선언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길이다.
- 2955호
- 세계인권선언,논평
- 인권운동사랑방
- 200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