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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노사정 합의? 인간답게 일하기 위한 싸움의 시작을 알릴 뿐이다(20150916)

9월 15일 한국노총이 노사정 잠정합의안을 의결함에 따라, 정부-경총-한국노총이 모여 만든 소위 ‘사회적합의’가 이루어졌다. 노사정위원회라는 낯익은 이름이 방송과 신문의 주요 뉴스를 장식하게 된 것도 참 오랜만이다. 토론, 의견수렴, 합의에는 별 관심도 없는 박근혜 정부가 먼저 나서서 사회적 합의니, 대타협이니 하는 말을 하는 상황도 아리송하다. 이번 노사정 합의의 주요 내용이 일반해고 요건 완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 허용업종 확대라고 한다. 이런 합의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게 될지 아는 게 쉽지 않지만, 정부여당이 노동개혁을 완수하지 못하면 모두 공멸이라며 올해 안에 반드시 마무리 짓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기는 있는 게다. 

노사정위원회,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낯선 말이 등장했던 19년 전 외환위기 때로 돌아가 보자.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를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힘을 합칠 것을 호소했다. 장롱 속 금붙이까지 기부할 정도였으니 당시 국민들이 느꼈던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불과 1년 전인 97년에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반대해 총파업 투쟁을 국민적지지 속에 이뤄냈던 노동운동에게 노사정위원회라는 테이블에 앉아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을 수용할 것을 ‘합의’라는 이름으로 강제했다. 당시에도 정부와 기업은 정리해고는 현금유동성 위기로 도산직전에 몰린 기업들이 시행할 수밖에 없는 경영상의 위기를 ‘정리해고’라고 표현한 것 일 뿐이라고 했다. 파견법 역시 일시적-계절적 인력수급, 전문 직종, 건설교통과 같은 업종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계약관계를 법제화하는 것 일 뿐이라고 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현실은 달랐다. 가뜩이나 사회보장체계가 부실한 한국 사회에서 일자리는 생명줄과 다름없는 것이었고, 87년 이후 성장한 노동운동은 ‘해고’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틈 타 도입된 정리해고는 이제 ‘해고’를 경영상의 이유로 언제든지 행할 수 있는 선택지로 만들어버렸다. 특수한 노동계약관계에만 적용될 것이라던 파견은 이제 일정규모 이상의 거의 모든 기업에서 도급계약을 통해 노동력을 공급받는 방식이 되었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불법파견, 저임금, 차별, 계약해지와 같은 말들은 이렇게 98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말이 되었다. 

위 사진:[사진설명 : 장그래운동본부는 9월 17일 오전 11시,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사정야합 규탄 광화문 비상 시국농성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출처: 참세상]


이번 노사정 합의의 핵심 내용인 일반해고 요건 완화에 대해 정부는 근로기준법과 충돌하는 게 아니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해 명확한 기준과 근거를 갖는 해고절차를 만들어 법적 분쟁을 줄이는 것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리해고만이 아니라, 사장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그럴싸한 명분과 절차를 만들겠다는 것. 직장 다녀본 사람은 안다. 업무능력, 성과평가는 모두 상급자 손에 달려있다. 혼자서 일하는 게 아닌 이상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는 어떤가. 노동조합이 체결한 단체협약이 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사측이 정한 취업규칙이 노동시간, 임금계산, 휴가 등과 같은 노동조건 대부분을 정하게 된다. 이걸 노동자들의 집단적 동의가 아닌 개별적 동의로 사측이 바꾸겠다는 거다. 개별적 동의를 받으니까 상관없다고? 이건 마치 인터넷 카페 회원 가입 시 약관동의를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회사 다니려면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98년 정리해고제가 그랬던 것처럼 일반해고 요건 완화는 사장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해도 된다는 강력한 신호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는 임금피크제와 같은 새로운 임금체계를 손쉽게 도입할 수 있게 되듯이, 익숙하게 여겨지던 사내 복지, 휴가 등과 같은 일터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놓을 것이다. 청년 일자리 창출?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다짐 정도만 할 뿐이고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핵심은 정말 사장 노릇 할 맛 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깜빡하게 되는 게 있다.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여러 노동법들은 모두 최소기준을 정할 뿐이다. 올해 최저임금 시급 5,580원보다 높은 시급을 지급했다고 사장이 처벌받는 게 아니다. 여타의 고용계약이나 노동시간 등도 마찬가지다. 법으로는 최소한 위반하지 말아야 기준만 정할 테니 나머지 노동조건은 노사자율로 협의하라는 것이다. 일반해고를 할 수 있다는 행정지침이 있다고 모든 회사에서 일반해고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요구와 싸움으로 얼마든지 의미 없는 조항으로 만들 수 있다. 얼마 전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7개 회사는 단체협약을 통해 “직무능력 및 성과평가의 결과만으로 해고할 수 없다.”는 조항을 명시했다. 

사회적 합의에는 관심도 없던 박근혜 정부가 노동개악을 위해 노사정위를 가동하고 대타협을 홍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개악은 법률을 자기들 마음대로 개정한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을 굴복시켜 합의를 받아내야 작동가능하다.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그런 싸움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사장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로 뭉쳐 있는 곳이라도 사장들에게 제대로 붙어보라는 주문이다. 노동자들을 굴복시켜 어떠한 합의라도 받아내기만 하면 되도록 관련법은 정비해주겠다는 것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없는 대다수 사업장에는 일반해고와 자유로운 취업규칙 변경이 이제는 법위반도 아니고 노사정 대타협으로 이룬 사회적 기준이니 눈치 보지 말고 사용하라는 메시지이다. 노사정 합의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싸움의 신호탄이다. 저들은 노동시장 구조개악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노사정 합의는 바로 그런 싸움을 벌이기 위한 기울어진 링을 만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강요되는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