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한반도 평화를 중심으로 한 외교 안보 문제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주변국 특사 파견, 한미정상회담, G20정상회의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7월 6일 '베를린 평화 구상'은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어 후속 조치로 남북군사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 제안되었다. 그런데 한국정부의 제안에 북한이 묵묵부답이다. 정전협정 64주년에도 우리는 평화체제로 가는 길이 멀다는 현실을 씁쓸하게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평화체제로 가는 데에 충분한 것일까?
달라진 조건들
'북핵 문제'는 80년대 말~90년대 초 탈냉전 시기에 시작됐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들었던 주변국들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북한은 한미일과 관계 정상화를 이루지 못했고, 정전체제가 지속됐다. 주한미군과 미국의 핵우산에 기초한 한미 동맹이 한국의 안보 전략이었다면, 탈냉전 이후 기댈 곳 없어진 북한에는 핵무기 개발이 정전체제 아래에서 안보 전략이 되었다. 그래서 북핵문제는 단지 일개 독재정권의 일탈이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무기 차원이 아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다.
북핵 문제를 규정하는 이러한 기본 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달라진 것도 많다. 북한은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국이 됐고,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화되고 있다. 핵무기 개발 중단-폐기라는 비핵화 과정과 경제 지원-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체제보장을 단계적으로 맞교환하는 방식의 협상이 이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로 더욱 분명해진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은 공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핵무기 동결-폐기-검증이라는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단계적 접근보다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한 포괄적인 접근과 협상이 필요하다. 중국과 북한이 제안하고, 미국 일각에서 호응하는 '핵, 미사일 실험 중단-한미군사훈련 중단'은 적어도 달라진 조건에서 협상이 시작될 수 있는 선택지다.
또한 그동안 한반도 정세가 북핵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탈냉전-남북 관계 진전-중국의 역할 등을 통한 긴장완화 국면이었다면, 지난 10여 년은 미국 패권 축소와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적극적 행보에 한미일이 군사동맹 강화로 호응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사드배치와 위안부 합의 문제는 이러한 긴장이 폭발한 예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목표와 한미 동맹의 확대 강화와 한일군사협력은 병행되기 어려운 조건인 것이다. '베를린 평화 구상'에서 6.15 공동선언 정신 계승을 말한 것은 좋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달라진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맞교환하는 단계적 접근법을 또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너무나 안이한 태도다.
문재인 정부의 우려스러운 행보
일국 내에서 정부가 갖는 압도적 영향력에 비하면, 국제 관계에서 일국 정부가 갖는 영향력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강대국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한반도 문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세계 초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남과 북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 분단-전쟁을 겪으며 아슬아슬한 정전체제 속에 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한반도 문제의 주체이자 당사자는 남과 북이라는 확고한 인식, 어떤 이유에서건 한반도에서 전쟁은 불가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초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하고 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한미정상회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보인 정부의 행보는 매우 우려스럽다. "강력한 안보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능케" 한다거나,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통해 압도적인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한미공동성명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으로 점철됐다. 이는 한국군의 미사일 탄두 중량을 2배로 늘리는 것을 협의하겠다는 후속조치로 이어졌고, 사드배치가 재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는 '한국형 미사일방어계획 조기구축계획'을 밝혔고, 국방비는 2022년까지 GDP의 2.9%(56조 7천억원)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제재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북한을 대화로 이끌겠다고 한다. 북한인권재단을 조기 출범시켜 인권문제를 의제화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한 손에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쥐고, 다른 편으로는 협박(제재)을 해서라도 북한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북한과 직접 대화를 꺼리는 미국을 대신해 이런 식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게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아닐 것이다. 핵개발을 넘어 핵보유국 지위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북한에게 한국은 매력적인 협상 파트너가 아니다. 정부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목표만큼이나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평화체제 구축자로서 한국
정부는 대북 적대시 정책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의 진심을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아닌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그런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남북관계가 정권에 따라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걸 경험한 북한에게 정부의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제안은 그리 미덥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호전성을 비난하기 전에 압도적인 한미연합 전력이 매년 펼치는 전쟁연습을 돌아봐야 한다. 이 강고한 분단 전쟁체제에서 한국은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의도 이전에 이미 북한과 한미 동맹이 한반도에서 벌이는 위험한 군사 도박을 직시해야 한다. 70여 년 동안 이어진 분단체제를 넘어선 평화체제 구축자로서 한국사회가 나설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게 절실하다. 이는 '베를린 평화구상'이나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상에 드러나는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선언으로 대치 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북한이 북한식 사회주의, 선군정치, 핵-경제 개발 병진 노선을 통해 체제를 지켜온 것처럼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은 한미 동맹에 기초한 반공보수 분단체제를 형성해왔다. 수구정당-국가보안법-검경-군대-국정원-보수언론으로 이어지는 강고한 네트워크는 한국사회 주류 지배층이었다. 이들 세력은 민주화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내파되었지만, 여전히 780만 표 득표, 거대 언론(종편, 신문사), 국가보안법에 기초한 각종 권력기관으로 산재해있다. 탈북자 출신으로 종편 방송에 출연해왔던 이가 재입북해 북한의 선전매체에 등장했다. 종편이 언론이라기보다는 휴전선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군대의 선무방송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을 상대로 24시간 선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 검찰, 경찰, 언론을 통해 종북 마녀사냥을 조직적으로 벌이고 사법부를 통해 정당까지 해산시켰던 이들을 반공보수전쟁 세력이 아닌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을까? 한국사회가 이들 반공보수 분단세력을 넘어 평화체제 구축자로서 확고히 서 나갈 때, 남북이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도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