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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인권 있는 인권조직으로 가는 길

지난 7월 마친 신입 인권활동가 공동교육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프로그램은 단연 ‘인권 있는 인권조직 만들기’였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동안 이야기도 끝없이 이어졌다. 인권조직에 인권이 없다고 느꼈던 상황을 빙고게임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들의 리액션이 예능 프로그램 뺨쳤다.

 

인권 조직에 인권 없다고 느껴질 때

 

인권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은 다양했다. “어리니까 강하게 커야지,” “이런 건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성별이나 나이 등의 위계와 차별을 강화하는 말과 행동들도 있었다.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하기에 애매한 상황들은 훨씬 많았다. 실수했을 때 무안 주거나 “내가 옛날에 다 해봤다.”, “옛날에는 더 힘들어도 다 했다.”는 등 경험이 권력이 될 수 있는 순간들이다. 역량을 고려하지 않는 과중한 업무를 부과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잡무’만 맡겨진다거나 하는 조직 내 역할 분담 문제도 있었다. 지속되면 일터괴롭힘일 수도 있는 상황들이다.

흔히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로 다뤄지는 상황들도 있다. 일은 내가 하는데 판단과 결정은 ‘위’에서 할 때, 회의를 하는데 모두의 의견을 들으며 논의하기보다 몇몇의 결정으로 끝나버릴 때, 갈등이 있는데 ‘대등한’ 싸움이나 개입이 어려울 때……. ‘노동권’의 문제로 접근되는 상황들도 많았다. 주말 근무, 야근, 바쁠 때 24시간 대기 등을 당연시한다거나, 휴가를 쓸 때 눈치 보이거나, 업무 마친 후 밥이나 술자리를 은근히 강요한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업무 관련 연락을 한다거나……. 퇴근 후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는 마당에 인권조직들의 현실이 씁쓸했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기엔 절박하다.

 

“인권단체가 맞습니까?”

 

지난 8월 10일 유엔인권정책센터(코쿤) 사무국 활동가들이 전원 사퇴했다. 입장문의 제목이 “유엔인권정책센터는 인권단체가 맞습니까?”였다. 입장문에는 반복되는 해고 위협과 권고사직, 활동성과의 폄하와 모욕, 위계에 따른 복종 요구 및 독단적인 의사결정 구조 등의 문제들이 담겨 있었다. 많은 인권활동가들은 코쿤 사무국 활동가들을 지지하는 연대의 선언을 발표하며 위로와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조직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활동가들이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9월 7일 저녁에는 <유엔인권정책센터 사무국 활동가 전원 사퇴를 통해 본 조직 내 민주주의를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문제가 공론화된 바 있는 평화박물관, 손잡고, 푸른사람들 등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들도 나와 각자 겪은 일들을 얘기했다. 인권 있는 인권조직 만들기 워크숍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활동가들이 추진하는 일이 제지당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강요된다거나, 조직의 재정 위기가 활동가에게 전가되거나, 활동가의 휴식과 성장이 독려되기는커녕 ‘책임은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한다며 무시되는 등, 같은 주제의 여러 변주였다. 그런데 누군가 쫓겨나거나 그만두는 등의 상황까지 내몰리게 되는 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문제 제기가 문제?

 

차이는 문제 자체가 아니었다. 조직의 구조나 규모, 성격에 따라 사건이나 문제의 양상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를 발견한 활동가가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로 지목된다는 점이었다. “넌 떳떳하고 당당하니?” 문제제기를 가로막는 주장 중 하나다. 활동가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으며 오히려 더 높은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래서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있지만 문제를 제기한 활동가에게도 문제는 있으니 결국 문제는 없다!? 조직의 문제를 조직적 문제로 다루기보다는 개개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문제로 축소시켜버린다.

다른 하나는 ‘노동’을 둘러싼 쟁점으로 드러난다. “넌 노동자가 아니라 활동가야.” 출퇴근시간이나 급여, 휴가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이 활동가의 본분이나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조직이나 운동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노동자’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활동가로서의 성장을 지원하기보다는 대체 가능한 노동자로 여기는 조직 문화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근 구조를 만들기 어려운 운동에 몸담은 활동가는 ‘노동자’가 자신의 문제까지 품는 언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노동자냐 활동가냐가 아니다. 누군가의 역할과 위치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평가하는 권력이 문제다. 문제 제기를 문제 삼는 조직에 인권이 깃들기는 어렵다.

 

시야를 넓혀야

 

문제 해결을 위한 묘책은 없었다. 누군가는 ‘해결’이 무엇인지 밝혀가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끝까지 남아 변화를 이끄는 것이 ‘해결’인 듯 여겨지지만, 정작 앞서 싸웠던 활동가는 안에서 싸우는 기간이 길어지면 바꾸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자기 단체나 자기 운동의 크기만큼 스스로가 작아지는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문제’나 ‘해결’의 시야를 한 단체 안으로 한정할 때 우리의 바람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문제는 무엇이고 해결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탐색하는 장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을 둘러싼 쟁점도 비슷해 보인다. 활동가에게도 적절한 휴식과 적당한 노동조건이 필요하고, 노동자에게도 일에 대한 자긍심과 자율성이 필요하다. 어쩌면 ‘노동자’에 대한 통념과 제도화된 만큼만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현실이 낳은 왜곡된 쟁점인 것은 아닐까. 우리 스스로 활동가인지 노동자인지 묻기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 필요한 권리를 짚어보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도 있겠다. 권리의 내용에 따라서 개개인이 노력할 부분도 있고 조직적으로 풀 수 있는 부분도 있겠으나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 부분도 있을 듯하다.

 

인권 있는 인권조직으로 가는 길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게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문제가 결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조직은 문제가 없는 조직이기보다 문제를 잘 발견하는 조직이고, 그래서 변화하기를 멈추지 않을 용기를 가진 조직일 것이다. 조직 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잘 갈등하는 역량을 이르는 말이다. 누군가의 일방적 침묵과 배제로 지탱되는 기만적인 민주주의는 인권운동이 늘 비판해왔던 것이지 않은가. 인권 있는 인권조직, 조직 내 민주주의 등은 이상적인,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운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활동이 그렇듯, 변화가 늘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문제를 말하고 듣고 함께 풀어가는 과정은, 빛과 그림자를 가진, 고된 투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권 있는 인권조직으로 가는 길이, 우리가 걷던 길과 다른 길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려는 바로 그 길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뭐 또 걸어볼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