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점 하나 찍고 나타나서 온 가족을 속이면서 복수를 하던 여주인공이 등장하던 막장 드라마를 요즘 박근혜 정부가 연출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민영화’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경쟁체제 도입, 법안 발의 등을 통해 사실상 민영화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모두가 쯔쯔즛 욕하며 보던 막장드라마의 목표가 시청률이었다면, 박근혜 정부가 연출하는 막장드라마를 흉내 낸 ‘민영화’의 목표가 무엇이기에 팔아치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민영화란 정부소유 기업을 민간에 매각하거나 기초적 사회서비스들을 민간 기업으로 넘기는 것이 대표적이지만, 소유권의 매각이나 이전만이 아니라 서비스산업의 상품화, 그를 위한 규제완화도 포함된다. 민영화의 대상은 도로, 에너지, 철도, 병원 같은 모두가 살면서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개인의 책임은 강조되고 사회적 책임은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민영화는 주요 정책이었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넘기는 신자유주의는 공공성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서비스, 장소 등)조차도 시장으로 팔아넘겼다. 그 덕에 몇몇 대기업은 배불리 이윤을 늘릴 수 있었고, 노동자들은 기업의 경비절감 대상으로 전락하여 대량해고와 불안정고용에 시달렸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은 높은 비용 때문에 전기니, 물이니 의료니 하는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못 하거나 질 낮은 서비스를 견뎌야 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민영화 이후 가격이 400%나 폭등했고, 전력회사 직원들의 40%나 해고되었으며 전기는 정전되었다. 이는 영국에서 수도민영화에서도, 미국의 캘리포니아 전력 민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한국에서도 공기업이던 한국통신의 지분을 SK텔레콤 등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1993년부터 진행된 민영화는 1998년 완전 민영화되어 현재의 KT가 되었다. 그 후 통신서비스의 질은 낮아지고 노조는 탄압받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영화라는 표현은 기업의 운영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공성의 파괴로 인한 삶의 질 저하를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업의 이윤확대를 사유화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우회적 민영화/사유화 정책
2007년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파산을 모두가 목도하였음에도 아직까지 민영화를 국가가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전히 국가예산으로 만들어놓은 알짜배기 기관을 ‘값싸게 사들여’ 높은 이윤을 챙기려는 기업의 욕구가 강하고, 기업의 욕구를 중심으로 정부 정책이 만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민영화정책을 추진하다 2008년 촛불 시민들의 반대로 민영화가 주춤되었던 기억때문인지 박근혜 정부는 우회적이고 단계적으로 민영화/사유화를 시도하고 있다.
철도만 해도 그렇다.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은 건설비용이 든다. 그 많은 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KTX 운영권만을 민간 기업에 넘기겠다는 것은 사실상 기업이 돈 안 쓰고 편하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민영화는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철도산업 민간검토위원회’를 꾸려 KTX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명분으로 2015년 개통 예정인 수서발 KTX 운영권을 넘기려고 하며, 2017년까지 화물, 차량정비, 유지보수 등을 자회사로 분할하는 철도분할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고 있다.
가스는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이 재벌이 산업용과 발전용으로 가스를 직도입해 재판매까지 할 수 있는 내용인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하여 가스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전기는 신규발전소 12개 중 8개를 민간에 넘기는 6차 전력수급계획을 통해, 의료는 병원의 호텔업을 허용하는 등의 영리병원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이름과 방식만 다를 뿐 민영화/사유화 정책은 변함없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후보시절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이 일방적 추진으로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 미흡했다”며 “철도, 가스, 공항, 항만, 방송 등 국가기간망에 대해 국민적 합의나 동의 없는 일률적인 민영화 추진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던 사실은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냐고 따져 물어야한다.
박근혜 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공공기관을 팔아 그 돈으로 복지 재원인 134조 8천억 원을 확충하거나 공공기관을 운영할 때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라는 세간의 평가가 많다. 하지만 복지가 인권이기 위해서는 복지정책의 수혜자는 ‘모두’여야 하고, 정책 수립과정에서 정책대상자가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공공성을 악화시키는 복지공약 실현이라면 인권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아랫돌 빼서 웃돌 괴는 꼴이다.
공공성에 담긴 사회적인 것을 바라봐야
한국에서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성공적인 민영화의 신화에서 벗어났지만 기업들이나 정부가 여전히 ‘민영화가 경쟁력이 있다거나 서비스 질을 높일 것’이라는 허상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공기업 민영화/사유화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그동안 ‘공공성’ 실현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공공재를 제공하는 의무주체이자 일 행위자인 ‘국가’에만 놓여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는 또한 ‘공공성’ 문제를 그저 ‘서비스 접근권 확보와 질의 강화’로만 받아들이거나 공공성 강화투쟁이 해당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만 한정되게 받아들이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민영화가 급속하게 해체한 사회적인 것에 대해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동안 공공성에 담긴 사회적인 것, 사회적 삶에 대해 우리는 얘기하지 않아왔다. 새로운 사회적인 것을 구축함으로써 공공성의 맛을 보게 하는 것, 사람들의 삶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일은 부족하지 않았나? 공공재를 사회구성원 모두가 제한 없이(선별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공공성 확보는 공공재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의 틀-윤곽(모양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바로 사회적인 것(관계, 모임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철도 민영화가 된다면 사람들에게 높은 비용부담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사회적 취약계층인 빈곤층이나 장애인이 철도 이용을 어렵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도에서 만나는 지역주민들 또는 이용자들의 다양한 접촉점을 막을 것이다. 아직까지 서울역은 서울역사 노숙인 강제퇴거방침을 여전히 철회하고 있지 않은데, 노숙인을 포함한 철도 역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임을 꾸려 공공성이 있는 철도역사 운영을 마련했다면 민영화/사유화는 사람들에게 다르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또한 진주의료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사, 간호사, 직원)과 이용인인 환자와 지역주민이 만난다. 진주의료원의 공공성이 어떻게 확보되냐에 따라 의료의 서비스도 정해지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서 사회적인 것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그동안 진료시간에만 만났던 이용인과 서비스 제공자들이 일상적으로 만나 무엇인가를, 다시 말해 삶과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장소와 관계를 구성했다면, 공공성 파괴는 사람들에게 서비스의 질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은,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고 경험한 ‘공공성 구현’이 직접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처럼 폐업으로 입원했던 사람들이 죽거나 건강이 악화되는 것으로 겪는 공공성 ‘박탈의 경험’ 외에도 ‘공공성에 대한 경험’이 더 많아지도록 말이다.
공공성 확보는 공공성을 매개로 사회적인 것을 마련하는 일이며, 그러할 때 공공재가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 시장에 팔아넘기려 할 때 우리 모두의 문제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하기에 민영화/사유화 반대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는 공공재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사회적인 것을 마련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