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동자들의 파업에 설레기 시작한 것은, ‘활동가’의 감수성이었다. 누군가 세상이 강요하는 것을 거역하고 저항할 때의 감동. 대규모 직위해제와 지도부 검거방침이라는 탄압에도 파업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당당함의 매력. 그런데 파업으로 쟁점이 된 철도민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니 내가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커졌다. 철도‘공공성’을 실현하자는데 나는 ‘공공성’의 어디쯤에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KTX 노선이 운영되고 나서 무궁화호 열차 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며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막상 어딘가 가야 할 곳이 생기면 시간을 핑계 삼아 KTX를 예매하게 된 지 오래다. 기차 요금이 제주 가는 비행기 값보다 비싸다는 것도 불만이기는 했으나 내라는 대로 내왔다. 그나마 기차를 많이 타지도 않고 전철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어떤 노선들이 폐지될 수도 있는데, 돌아보면 기차역이 있는 곳은 기차로, 없는 곳은 버스로 다니는 것에 충분히 길들어져왔다.
‘공공성’은 무엇일까
나에게 철도민영화란 그저 남의 문제인 것일까. 하늘의 별 따기인 무궁화호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기차 요금이 너무 비싸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었던 사람들, 기차노선이 폐지되어 더 이상 기차를 이용할 수 없게 된 지역 사람들의 문제? 혹은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미래의 문제? 그러고 보니 철도민영화를 막으려고 자신의 삶과 미래를 건 철도노동자들에게 철도공공성은 무엇일까. 기차를 탈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려는 이타적 요구?
민영화가 쟁점이 될 때 공공성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소유와 운영의 주체가 민간자본에 넘어가는 것, 요금이나 편의 등 해당 서비스 이용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 그러나 이 두 가지로는 공공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철도 사태를 떠올려도 그렇다. 민간 자본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엄청난 손실을 국고에 부담시키며 지분의 대부분이 국가로 넘어왔고 코레일이 운영을 맡게 되었다. 민간 자본이 하면 언제나 더 효율적이라는 전제에 대한 반성도 없었고, 비현실적인 수요 예측으로 사업을 부풀린 민간자본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하게 되었다고 해서 ‘공공성’이 강화되었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민의 발’이 ‘시민’의 손해를 담보로 거래되었을 뿐이다.
후자도 마찬가지다. 철도, 의료, 수도, 가스 등의 민영화 문제는 ‘요금 폭등’으로 부각된다. 다수인 이용자들이 겪게 될 문제가 ‘공공성’의 쟁점이 된다. 그런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때마다 쏟아졌던 비난, “시민의 발을 볼모로 삼는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도 공공성에 대한 어떤 감각을 노린 것이다. 이용자의 권리는 더욱 공적인 것, 노동자의 권리는 사적인 것이라는 감각. 공적인 것, 공익을 위해 사적인 것들은 양보하거나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난 11일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이 방만경영을 집중관리하겠다며 문제 삼은 것도 바로 ‘과도한 복리후생’이었다. 휴직급여, 퇴직금, 교육비, 의료비 등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 여전히 많은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는 권리를 도마에 올린 것이다. 공공성의 의미를 묻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민영화’는 다가오는 사건?
철도노동자들은 이미 십 여 년 동안 ‘민영화’를 겪었다. 1999년 국무회의에서 ‘철도청 민영화 및 공단화’ 방침이 확정되고 2001년 철도 민영화를 위한 입법이 추진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 민간매각은 막았지만 2005년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철도시설공단으로 나눠졌다.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민영화를 추진했다. 민영화를 반대하며 파업을 벌였던 철도노동자들은 대규모 징계와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철도 관련 전기, 장비운전, 시설유지․보수 등 업무의 외주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잘렸고, 누군가는 직장이 달라졌고, 누군가는 함께 일하던 동료와 헤어졌다.
일도 힘들어졌다. 1인 승무 차량이 꾸준히 늘어왔다. 기관사 한 명이 열차 운행과 안전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그만큼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므로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다. 그런데 기관사들에게는 안전사고 발생에 대한 불안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황장애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됐고, 일반적인 질병의 발생이 늘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안전사고 발생을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료의 안타까운 소식들도 전해졌다. 안전운행을 위해 인력을 충원해야 하는데 고용을 늘리기는커녕 인턴으로 대체하고 외주화를 추진하는 코레일, 연차 휴가의 사용을 자제하고 정히 휴가를 써야 하면 일의 순번을 바꾸라는 코레일. ‘민영화’는 눈앞에 다가온 어떤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어떤 흐름이다.
이 흐름은 철도노동자와 관계된 것만은 아니었다. 민자역사 사업은 철도청 시절부터 추진되었고 역사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2011년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 방침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노숙인들은 쫓겨나야 했다. 2006년 ‘철도공사 경영개선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 추진계획으로 밀어붙인 용산 역세권 개발사업은 어떤가. 용산 일대의 개발을 부추기면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더니 ‘드림허브프로젝트’는 결국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개발의 바람에 불이 붙어 ‘용산참사’에 이르렀고, 누군가는 가족을, 집을, 가게를, 미래를 잃었다.
‘공’과 ‘사’를 가르는 힘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사적인 것으로 쉽게 밀려난다. 철도노동자의 안전할 권리, 건강할 권리, 쉴 권리, 일할 권리와 같은 것들은 ‘공공성’의 이름을 얻지 못했다. 노숙인들은 ‘시민의 안전’을 내세우며 공공을 자임하는 코레일에 의해 쫓겨났다. 철거민들은 ‘공익사업인 개발’을 위해서라며 쫓겨났다. 노동자들은 ‘공공서비스의 질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났다. 정부는 사적인 것으로 내팽개쳐진 권리들 사이의 갈등은 사적으로 풀라고 한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장에서 언급하지 말라고 한다. 기업의 인권침해에 항의하면 정부는 사적인 것이라 손을 쓸 수 없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적인 것일 뿐이니 ‘공익’을 위한다며 진압한다. ‘공’으로부터의 배제는 ‘사’의 세계를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받아들이고 살라는 형벌이다.
민간자본은 공적이기도 하고, 공기업은 사적이기도 하다. 다만 ‘공’과 ‘사’를 가르는 힘이 민간자본의 공적 횡포는 사적인 문제, 공기업의 사적 경영은 공적인 문제로 만들어낸다. 노동자의 권리는 사적인 것, 정부의 권한은 공적인 것이라는 감각도 그 경계에 있다. ‘공공성’이라는 말이 전제하는 듯한 ‘공’과 ‘사’의 경계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다. 공공성은 언제나, 모두에게 관계된, 열려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끌어들이고 누군가는 배제하는 힘은 ‘모두’에게 작용한다. ‘모두’의 삶을 각자가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공’과 ‘사’라는 구분으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정치에 맞서는 것이 공공성의 정치다. 경계를 짓는 힘에 맞서 우리들이 스스로를 무엇인가에 관계시키기 시작할 때 공공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들이 서로를 관계시키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사적이지 않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는 결코 사적이지 않다. 철도노동자들이 인천국제공항철도나 용산역세권개발사업의 가장 진지한 비판자였고, 노숙인들이 강제퇴거를 당할 때 가장 든든한 동료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자신을 관계시키는 과정이 노동자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일을 할 권리, 내 몸을 보살필 권리, 아프지 않을 권리, 모일 권리, 뭉쳐서 함께 도모할 권리……. 내 몸으로 만들어낸 무언가가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즐거움을 누릴 권리. 우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철도’에 관계시키듯 노동자의 권리도 공공성의 시작점이다.
‘우리’를 만들어가는 공공성의 정치
철도파업은 공공성을 지키는 싸움이기보다는 차라리 공공성을 만들어내는 싸움이다. 철도를 이용하는 우리가 부담해야 할 요금, 철도역을 이용하는 우리가 누려야 할 공간, 철도를 운행하는 우리가 누려야 할 건강과 복지, 이 모든 ‘우리’의 삶을 ‘모두’의 문제로 만들어가는 것이 공공성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 바람이야말로 ‘사’들이 서로를 관계시키며 공공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내 삶에 관계된 것들이 나와 무관하게 결정되어 버릴 때,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와 연루될 때, 안녕할 수 없는 나. 그런 ‘나’들을 확인하고 불러내며 안부를 묻는다. 그렇게 ‘우리’가 된다. 요금을 내라는 대로 낼 수밖에 없었던 ‘나’도, 철도요금이 올라서는 안 된다고 힘을 모아 싸우는 ‘우리’가 될 수 있어 든든해진다. ‘공’의 이름으로 사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사’의 이름으로 공을 짓밟았던 힘들을 겨누는 ‘우리’를 기대하게 된다. 나는 그래서, 조금은 안녕해졌다. 그리고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에 설레는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