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이 넘었군! 배우자가 임신을 했던 때가. 배우자의 임신은 ‘생애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지. 30여 년 동안 부모님께 빌붙어 살고 결혼해선 배우자에 빌붙어 활동하다가, 내가 돈을 벌어서 배우자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할 바로 그때가 온 것이었지.
처음엔 참으로 막막하더군! 내가 가진 재주는 내 몸 하나는 건사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운동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다시 말해 돈 버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었는데, 그런 내가 나말고 두 식구나 먹여 살릴 돈을 벌어야 한다니까 말이야. 도대체 어느 정도 벌어야 세 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말이야.
그렇다고 운동을 (잠시) 그만 두고 일단 돈 버는 데 전력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 왜냐하면 운동은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뭐랄까! 내가 살아가는 의미의 원천이자 내 삶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어떤 형태로든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시간제 일자리를 찾기로 했지. 단 학생들을 시험의 정답기계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파는 과외나 학원강사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
그리고 임신 중인 배우자에 충실하고 양가의 대소사를 챙기기 위해 가능하면 주말에는 쉴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지. 물론 이런 조건의 일자리는 분명히 벌이가 시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검소하게 살면서 생활비는 최소화하기로 했지.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배우자도 여기에 동의를 했고.
정규직은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았고, 그래서 벼룩시장을 뒤지면서 일자리를 찾았지. 그런데 정말 내가 원하는 조건의 일자리는 정말 없더군. 주유소 아르바이트나 음식점 서빙은 보수가 너무 적었고, 보수가 괜찮은 일자리들은 주말이 자유롭지 않아 가족 대소사를 챙길 수 없을 것 같았지. 사우나 카운터는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고, 주차장 관리는 격일로 계속 일해야 했어.
아파트 청소는 주중에만 하는 일이었지만, 매일 낮 4시 정도에 끝나기 때문에, 임신한 아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의미있는 노동을 하고 싶어 간병인 자리도 알아봤는데, 연락한 곳마나 남자들은 쓰질 않는다고 하더군. 한번은 괜찮은 보수에 연락처만 적어 놨길래 어떤 일인지 알아보려고 전화를 했지.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일단 와보라고만 해서 전화를 끊은 적도 있지.
결국 내가 시작한 일자리는 신문배달이었어. 일단 새벽에만 일을 하기 때문에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고, 어찌 보면 남들이 잠든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시간을 보다 알차게 보내는 것 같기도 했지. 지금도 그때를 정확히 기억해. 왜냐하면 작년 추석연휴 이후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신문배달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더군. 일단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으나, 바로 그 새벽작업을 위해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어. 왜냐하면 새벽 2시30분에는 일어나야 했거든. 때때로 늦어 밤 10시 정도에만 자도, 그 다음날 배달은 아주 죽을 맛이었지.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매일같이 배달을 해야 했는데, 비나 눈이 올 때는 평소 배달시간보다 1.5배 이상 길어지지. 한번 저녁은 폭설이 내렸었는데, 다음날 오토바이로 3-4번은 미끄러지면서 아침 7시30분에야 배달을 마칠 수 있었지. 보통 빠르면 5시30분 정도면 끝나는데.
하지만 무엇보다 보수가 충분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었지. 첫 달엔 23만원 정도 벌었고, 가장 많이 벌 때가 45만원 정도였어. 아무리 검소하게 산다고 해도, 이건 생활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소득이었지. 그리고 당시에는 정말 출산비용이 200-300만원 정도 크게 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문배달만 가지고는 도저히 아이 낳을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고 여겼어.
그런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문배달을 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던 때던가, 나는 우연찮게 아는 사람으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도우미 자리를 소개받아, 일주일에 3일 일하는 비정규 직장을 가지게 됐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도우미는 주5일 일할 수도 있고 주2일 일할 수도 있는데, 나는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최소한의 생활비를 번다는 기준으로 주3일 노동을 택한 것이야.
사실 신문배달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운동은 상당부분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운동을 해 나갈 때 사람들과 팀웍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팀웍을 형성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저녁 뒷풀이 술자리를 나는 함께 할 수 없었거든. 그나마 매일 사랑방에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운동의 감수성은 잃지 않을 수 있었지.
그런데 노동연구원엔 주3일 노동을 해야 하니까, 사랑방에 나올 수 있는 날은 물리적으로 이틀밖에 없었지. 그래서 나의 본격적인 반쪽 짜리 활동은 사실 지난해 10월말 노동연구원에 나갈 때부터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내심으로 기뻤어. 왜냐하면 활동은 반쪽이 되었을지 몰라도, 내 삶은 처음으로 한쪽이 되었거든. 즉,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일주일에 3일은 노동연구원으로 나가면서, 반쪽 짜리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배우자가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내가 돈을 벌어야 하거든. 신문배달은 어떻게 됐냐고? 그래도 그 해 겨울을 넘기면서 7개월 정도 했다. 그런데 배우자가 처형 집에서 산후요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저녁 8시면 어김없이 잠을 청해야 하는 신문배달을 계속할 수가 없더라고. 육아를 공동으로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올해 5월 정도에 그만뒀지.
반쪽 짜리 활동이 1년여 계속되어 오면서, 나의 삶과 활동은 새롭게 안정되고 있어. 전일 상근하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 내 활동력은 반절 이하로 떨어졌지만, 어쨌거나 내가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감이 생겼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나는 내가 반쪽 짜리 활동가의 전형이 되어 보겠다는 아주 작은 목표가 있지. 배우자와 아이를 부양하면서도, 비록 반쪽 짜리일지라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 성공 사례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야.
지금까지 사랑방이 채택한 유일한 운동원칙선언, 이른바 ‘독립군 정신’! 그 중 이런 구절이 있지. “운동에서 나오는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나 명망에 의존하는 삶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다. 운동을 나의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을 위해 어떤 고단함도 받아들인다.” 그래, 내 반쪽 짜리 활동은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을 위한 작은 고단함일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