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2023년 새해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랑방 30주년에 너무 몰두해왔기 때문일까요? 본격적으로 기획 논의와 준비를 시작한 지도 반년, 중간에 잠깐 멈췄던 시기를 포함하면 1년 가까이 준비해온 <기꺼이 엮다 – 인권운동사랑방 30년>을 진행하는 동안은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작년을 살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3월 31일 진행했던 후원의 밤 <기꺼이 엮인 우리>까지 마무리한 뒤, 그동안 미뤄왔던 2023년을 시작하느라 조금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에요. 마음 모아주신 수많은 분들 덕분에 커다란 뿌듯함,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큰 부담감을 느끼면서요.
사랑방은 매년 초 1/4분기 총회에서 그 해의 활동과 조직 업무를 다시 배치합니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지는 않아요. 기본적으로는 순환 업무를 지향하지만, 각 활동가마다 관심을 가지고 주력해온 분야가 있기도 하니까요. 조직 업무는 최대한 순환하되, 활동의 경우에는 안식년과 같이 큰 계기가 있지 않으면 주로 맡아온 활동을 계속해서 맡게 됩니다. 그런데 올해의 저는 예년과 달리 조금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어요. 꽤 오랫동안 맡아 온 조직 업무가 다른 업무로 바뀌었고, 기존에 맡아온 활동은 정리를 앞두고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활동들에도 결합하게 되었거든요.
새롭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업무를 진행하거나 처음 가 보는 회의 자리마다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하루빨리 익숙해지고 싶다는 조급함, 이 모든 게 나의 깜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은 자괴감까지.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괴롭히는 건 “(새로운 일을 접할 때) 나만 이렇게 힘든가” 하는, 어떤 억울함이었습니다.
사랑방 상임활동가로 입방하고 맨 처음 썼던 활동가의 편지에서도 말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익숙한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즐거움보다 긴장과 고됨을 훨씬 더 크게 느끼는 편입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잘 모르는 일을 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는 혹시 내가 무언가 실수하지는 않을까, 빼먹은 일은 없을까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저에게 뭐라 하지 않을 때도 말입니다. 새로운 일보다도 언제나 이런 식인 저 스스로에게 더 지쳐가고 있던 무렵, 작은 위안이 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 우연한 기회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어요. 얼마 전 두 번째 상담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중에서 ‘기질’과 ‘성격’을 나누어서 살펴보는 검사가 있었습니다. 기질은 타고난 것으로 잘 바뀌지 않지만, 성격은 기질에 환경이 더해지며 형성되는 것으로 가변적이라는 정도의 설명을 들었어요. 기질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봤을 때, 저는 ‘자극을 추구하는 기질’은 극단적으로 낮은데, ‘위험을 회피하는 기질’은 극단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성향이 강하고,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규칙이나 질서가 깨질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매사에 쉽게 지치고 에너지가 떨어진다는 설명 하나하나 제 이야기가 아닌 게 없었습니다.
“세상 살아가기 힘든 기질이죠. 이런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억울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검사 결과를 함께 살펴보며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해하지 말라거나 억울함을 달래주는 게 아니라, 억울해도 뭐 어쩌겠냐는 말이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막연한 불안이 문득 너무 크게 느껴질 때, 막막하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생각이 쉬이 가시질 않을 때, 저 말을 떠올리며 가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어 억울하지만, 뭐 어쩌겠냐는 마음으로요.
검사 결과를 살펴보던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랬습니다. “운동하세요. 남들보다 에너지가 더 없으니 운동하기 힘든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OO 님 같은 경우에는 살려면 운동 좀 하셔야 돼요.” 다음 활동가의 편지에서는 제가 드디어(!) 운동을 시작했다는 근황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