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건우에게 날아온 것은 넘어진 데 대한 걱정도 아니고, 왜 넘어졌는지에 대한 해명 요구도 아니었다. “누가 저를 밀었어요. 분명히 누가 달려들었는데…….” 우물거리는 건우의 말을 선생님은 더 이상 듣지 않았고, 화분을 깬 책임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고스란히 건우에게 넘어왔다. 바로 노란색의 ‘나쁜 어린이 표’ 한 장!
‘나쁜 어린이 표’(아래 나쁜표)는 건우 선생님이 스스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만든 제도다. 학생들이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나쁜표를 한 장씩 주며, 이 표 딱지는 교실 벽에 부착된다. 나쁜표를 세 개 받은 학생은 청소 당번이 아니어도 청소를 도와야 하고, 청소가 끝난 후에는 수학문제를 30개나 풀어야 한다. 물론 착한 행동을 했을 때 주어지는 ‘착한 어린이 표’(아래 착한표)도 있는데, 착한표를 받으면 나쁜표 한 장이 무효가 된다.
체벌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나쁜표란 제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쁜표란 제도가 과연 체벌보다 나은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한다. 화분을 깬 것은 분명 건우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화분을 깨는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책임만 지면 됐지, 그 사람이 건우인지 아닌지, 즉 처벌의 정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쁜표 제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한 아이에게 나쁜표를 주는 일이지만, 무엇이 나쁜 행동인지에 대한 사법적 심판 행위를 내포하고 있고, 이러한 사법적 심판에는 항상 권력과 정당성의 문제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우는 결국 하는 수 없이 나쁜표를 받았지만, 나쁜표를 건넨 선생님의 행동에 대해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이렇게 됐을 때 다시 화분이 깨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들은 화분을 깬다면 나쁜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강압적인 처벌에 대한 회피에 기초해 앞으로는 화분을 깨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건우가 또 나쁜표를 받은 이유는 화장실에서 욕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건우는 나쁜표를 받은 것이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화장실에서 혼자 욕을 한 사실을 선생님을 알았다면 누군가 고자질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나쁜표를 줄 거면 자신뿐만 아니라 고자질한 애에게도 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자질한 아이에게는 나쁜표를 주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나쁜표 제도가 아이들간의 일상적인 감시 체제를 작동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나쁜표 제도에 대한 불만이 건우에게 쌓여가고 있는 가운데, 선생님은 매우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 하는데, 이번에는 창기가 늦게 들어왔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선생님은 창기에게 나쁜표를 한번에 두 장이나 줬고, 그것도 모자라 착한표로 나쁜표를 감하는 규칙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쁜표 3장, 착한표 3장을 받고 있던 정욱이도 수업이 끝나고 남게 됐다. 나쁜표 제도의 규칙은 아이들과의 어떠한 민주적 소통과정 없이 권력을 가진 선생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정된 것이다.
그래서 건우는 스스로 작은 반항을 한다. 자기 공책에다 ‘나쁜 선생님 표’를 하나씩 적어나간 것이다. 나쁜 선생님 표 하나! 고자질한 애한테도 나쁜 어린이 표를 줘야지요. ……. 나쁜 선생님 표 넷! 창기는 떠든 게 아니라 수학 문제를 물었을 뿐이에요. 나쁜 선생님 표 다섯! 선생님은 친절하지 않아. …….
상황이 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제 선생님의 관점이 아니라 학생들의 관점에서 나쁜표 제도를 완전히 곱씹어 보게 된다. 그리고 도대체 왜 나쁜표 제도를 도입하게 됐는지 애초의 문제의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나쁜표 제도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존재하는가? 백번 양보하더라도 나쁜표 제도는 과연 아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게 관리된 아이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가?
단행본 『나쁜 어린이 표』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짜임새 있게 그리면서 매우 많은 인권적 논점을 던지고 있다. △교실 내의 절대 권력(선생님) 문제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작동되는 감시 체계 △행동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판단과 처벌 △문제 상황에 대한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판단 △나쁜표 자체의 부정적인 자기 암시와 노골적이고 강력한 딱지 효과 등.
사실 『나쁜 어린이 표』가 그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해법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학급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아이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건우에게 2학기에는 반장이 되어서 반을 이끈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하는 속내도 사실은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학급 운영의 효율을 핑계로 나쁜 어린이표의 결정적 단점들을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효율성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권적인 태도와 양립하는 개념은 아니다.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보다 민주적으로 그리고 보다 인권적으로 아이들과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효율적인 학급 운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쁜 어린이 표』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일 것이다.
책의 말미. 건우가 쓴 ‘나쁜 선생님 표’의 내용을 우연찮게 본 건우 선생님은 속으로 많은 고민을 한 후 건우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네 덕분에 애들을 가르치기가 더 힘들겠구나.” 체벌도 아니고 나쁜표 제도도 아니라면, 교실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우 선생님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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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인권운동사랑방 후원회원모임이었던 「꿈꾸는 사람들」이 지난 2월 모임의 성격을 ‘인권책읽기모임’으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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