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나의 관심은 온통 영성과 관련된 개인적 초월과 신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사회적 관심이 있었다면 교회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났는데, 저항보다는 순종을, 자유와 해방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책무를 앞세우는 개신교적 삶의 양식이 자연스레 내 몸에 베어버렸다.
신학대학의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나는 교리적으로 포장된 교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청년 예수를 만났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간 청년 예수의 순수와 만난 것이다. 예수의 삶은 내가 그동안 종교의 틀에서 만난 예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심지어는 그의 삶을 ‘종교적’, ‘기독교적’, ‘성서적’이라는 잣대로 판단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들며 사회/정치/종교적 성역(聖域)에 도전했고,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새롭게 해석했으며, 민중의 관점에서 제도적 종교를 재해석했다. 예수의 삶을 만난 후, 나는 그를 닮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어 어설프게 경계를 넘나드는 흉내를 냈다. 교회 밖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 개신교 신학생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기준을 ‘사람중심’의 관점에서 재해석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예수에 의해 운동권에 포섭(?) 되었다.
내게 익숙한 터전이었던 교회에서 나는 예수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이는 그가 더욱 종교적일수록, 신앙이 더 깊을수록 그랬다. 유대교의 율법체계가 뜻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적 통치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상황에서 예수는 율법의 ‘위반’을 통해 사람들에게 참된 율법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애썼다. 하여, 노동을 금하는 안식일의 율법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는 그는 제자들과 밀밭에 나가 손수 밀을 베어 먹는 중노동(?)을 하고, 병든 자들을 위로하러 먼 길을 여행 떠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주류사회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과 함께 기꺼이 ‘죄인’이 되어 주류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삶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며 살아갔다. 그는 여느 정치가의 민심대장정처럼 자신의 안정적 지위를 바탕으로 동냥하듯 민중을 향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은 자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변인으로 살았다. 기득권에 도전하는 모든 행동이 그렇듯, 예수 또한 그의 삶의 결과로서 죽음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로마제국의 식민세력과 유대사회 내부의 종교적 기득권세력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선택적 자살의 성격이 크다. 죽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세력 로마제국과 식민세력에 기생하는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의 안정된 삶을 꾸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전태일 열사의 삶에서, 공의를 위해 제 한 몸을 불사른 투사들의 불꽃같은 삶에서 나는 기독교인보다 더욱 기독교적인 예수의 삶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을 보는 이유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선택적 자살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그런 예수를 그들의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들의 고백은 철저히 예수의 삶에 기초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아래 신음하던 팔레스타인 민중의 아픔을 제도화된 유대종교체제가 외면할 때, 예수는 경계를 넘나드는 특유의 위반의 전략(?)으로 억압당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다시 주인이 되는 해방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예수가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 예수의 정신에 닿아있지 않은 수많은 종교 상인들이 교리적으로 포장된 예수를 팔아 대형마트의 매장을 채우듯 대형기업교회의 예배당을 채우는 현실이 애통하다. 그들은 민중의 소외를 종교적 호기로 이용할 뿐, 예수의 삶과 투쟁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의 삶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이단, 용공좌파 따위로 몰아가며 죽이기에 급급하다. 사람중심의 가치, 자유와 해방을 참된 인간됨을 위해 경계를 넘나들었던 삶의 예수가 그들은 그저 불편할 따름이다. 그보다는 교리적으로 덧칠된 ‘하나님 예수’가 세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기에는 더욱 편안한 까닭이다. 삶의 현실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도저히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한 시기에 종교상인들은 득세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70,80년대 세계교회사에 유래 없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과연 자랑할 수만은 있을까.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수의 정신은 교회 안에만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내가 사랑방을 찾아온 이유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종교성을 띤다고 말한다면 다들 손사래를 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제도적 종교가 잃어버린 참된 예수의 정신이 교회 밖에서, 여기 사랑방과 같은 시민사회단체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정신은 오늘날 천박한 자본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의 온상이 되어 버린 대형기업교회의 전유물일 수 없다. 로마제국과 유대 기득권사회의 이중적 억압구조 속에서 갈릴리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예수의 삶은 오늘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인간중심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이들의 삶 속에 현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방에서 만나는 작은 예수의 얼굴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