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상임활동가의 편지두울] 세계사회포럼 참가기

헝클어진 머리칼에 큰 눈망울을 굴리며 돈과 음식을 달라며 손을 내미는 ‘검은’ 아이들, 고가 도로 밑 혹은 길거리 한구석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이면 으레 들어차 숙식을 하는 무리무리.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난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 인도 뭄바이의 네스꼬 그라운즈 담장 안에서는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 세계사회포럼 2004(http://www.wsfindia.org/)가 열렸다. (관련 글 인권하루소식 2004년 1월 20일자)

132개국에서 약 8만 여명(이중 80% 이상은 인도의 최하층민인 달릿이라고 추산)이 참여한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각종 컨퍼런스와 포럼, 워크숍들이 가득했고, 이른바 ‘거리의 민중포럼’ 역시 즐비했다. 뜨거운 더위가 쏟아지고, 뿌연 먼지와 인도 특유의 냄새가 뒤범벅되어 있는 가운데 네스꼬 그라운즈를 가로지르는 거리 곳곳에서는 숱한 인파들이 음악에 몸을 맞춰 행진하고 있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거리 캠페인은 물론, 비주얼 아트 전시, 퍼포먼스 등의 문화 행사들이 유달리 풍성했는데, 세계사회포럼의 미래를 논하는 포럼 자리에서 한 발제자는 회의장 내에서 열리는 워크숍이나 세미나 못지않게, 몸짓과 노래, 영상 등 문자 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알리고 이슈를 표현해내는 소통 방식에 좀더 주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세계사회포럼 2004 영화제는 비경쟁 영화제로서 조직위원회가 마련된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17일부터 20일까지 총4일 간 개최되었다. 처음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영화제라는 일정 수준의 물적 조건이 필요한 간단치 않은 행사가 세계사회포럼에서 열린다는 게 다소 낯설게 다가왔지만,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모토가 상징하는 바, 전세계 저항 운동의 주체들이 모인 축제의 장에서 각지의 진보적 영상물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우선 반갑고 설레었다.

세계사회포럼의 문화행사의 준비위로부터 의뢰를 받아 영화제의 총괄을 맡았던 인도의 매직 랜턴 재단(http://magic-lantern.org) 측은 군사주의와 평화, 가부장제 등 세계사회포럼의 핵심의제를 충실히 반영한 작품들을 상영하면서, 세계사회포럼의 방향성과 합치되는 영화제를 만들겠다고 사전에 공고한 바 있다. 인도 등 아시아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중심으로 세계각지에서 도착한 총 83편의 작품들은 각각 ▲세계화된 시장 (The global market), ▲일과 생존의 세계 (A world of work and survival), ▲전쟁에서의 세계 (A world at war), ▲학대당하는 세계 (The world, abused), ▲삶, 정치 그리고 투쟁 (Life, politics & struggle), ▲여성의 세계 (Women's world), ▲정체성(Identities), ▲문화/저항 (Culture/ resistance), ▲다른 세계는 숨쉬고 있다 (Other worlds are breathing) 등 10여 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상영되었다. 영화제 조직위원회 측은 상영작들을 선택할 때,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보다 저항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상영작 중에는 투쟁의 성과들을 기록한 짧은 동영상 수준에 머무른 작품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이미 진보적 성격의 영화제들에서 소개되어 호평을 받은바 있는 수작들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변천해온 '주식회사'의 역사적 맥락을 탐방하며 그 영향력,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흥미진진한 분석을 시도한 , 독일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낙인찍히며 살아가는 한 여성의 우울한 초상, 이와 비견되는 고도화된 물질 세계를 포개어 놓으며 제3세계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겪는 절망감을 전하는 , 멕시코, 남아공, 아르헨티나, 한국 등지에서 벌어진 반세계화 운동의 현장들을 문학적인 나레이션과 유려한 영상으로 담아낸 <제4차 세계대전> 등이 그들이다.
(http://www.lnp89.org/new/bbs/view.php?id=7th_program&no=4) 또한 지난 9월의 칸쿤에서 있었던 투쟁을 담은 국내작 <킬로미터 제로>도 상영되었다. (mms://211.48.20.33/studioiscream_com/cancuntrailer.wmv)

지난 9월에 이르러서야 개최 여부가 결정되어 5명의 사람들이 4개월 동안 다급히 준비한 이번 영화제는 곳곳에서 빈약한 인적, 물적 조건이 만들어낸 빈 구멍들이 보이기도 했다. 프로그래밍 책자가 제때에 공급되지 못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상영장 안으로 향해야 했고, 제대로 장비가 갖추어지지 못한 덕에 상영이 자주 중단되었다. 전반적으로 상영환경이 열악했지만 빼곡이 들어찬 관객들은 별다른 불평 없이 자유롭게 영화제를 즐기는 듯 보였다. 연간 8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는 영화 산업 강국인 인도에서 영화 관람이 그만큼 익숙한 경험이기 때문일까. 힌두어 자막이 깔려 있는 영화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장 대부분은 채 10살도 못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들에 이르는 인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영화 상영도중 친구와 소곤소곤 속삭이거나 때론 편안히 뒹굴면서 스크린 위에 꽂혀진 눈들이 모여 있는 상영장의 풍경은 어느 순간 신선하게 다가왔다.

상영장 밖에서 3-4명에 이르는 스텝들은 관객들로부터 쏟아지는 온갖 질문들을 받고 수시로 일어나는 상영 사고들에 대비하느라 계속 분주했다. 이번 영화제의 책임을 맡은 매직 랜턴 재단의 Gargi Sen과 짤막한 인터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1명당 10인 이상의 몫을 수행해야 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작품 프로그래밍과 영화제 개최를 위한 기금 마련, 조직 운용까지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각지의 투쟁 사안들을 공간적 제약을 넘어 널릴 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하고 보람차다며 2005년 브라질에서 열릴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영화제를 다시 맡고 싶다고 단언했다. 앞으로는 영화제를 조직하는 의욕적인 활동가들이 좀더 많이 결합했으면 좋겠다며 기대감을 비치기도 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의 회의장 안팎, 길거리 안팎에서도 역시 크고 작은 카메라들은 끊임없이 돌아갔다. 행사장 중앙에 자리 잡은 미디어센터 안에서는 별도로 대안미디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고, 국제적인 독립 미디어 활동의 하나의 집결점이라고 평가받는 독립미디어센터(IMC)(http://www.indymedia.org)는 이번 포럼 기간에도 인도 미디어센터(http://www.india.indymedia.org)를 활용하여 사회포럼 현장에서 제작한 동영상들을 올렸다.

세계사회포럼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사실 가장 크게 기대했던 바는 소비의 수단이나 고단한 일상의 도피처로만 규정되기 쉬운 영화를, 세상과 호흡하는 매체로 활용하는 전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활동가들과 생생한 경험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결국 원하던 바를 뾰족이 이루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뭄바이를 떠나야 했지만, 뭄바이에서의 마침을 아직은 투명한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