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음날 경향신문에서 ‘특종’으로 발표한 ‘투표함 쪽지 넣기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어이없는 오보였다. 경향신문은 “선관위는 30일 이를 투표 방해 행위라고 규정, 강력대응 방침을 밝혔으나 이들은 ‘강행하겠다’며 선관위와 정면대치하고 있다”는 기사를 발표함으로써 선관위와 네트워크의 ‘대결’을 교묘하게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직적으로 투표함에 이물질을 넣는 행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등을 선관위의 입을 통해 거론하면서 ‘법 절차’와 ‘사법처리’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랑방은 선관위의 입장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경향신문에서는 사랑방이 선관위의 입장을 알면서도 고의로 정당한 법 절차에 대항하려고 하고 있다는 식의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다. 이에 사랑방에서는 경향신문의 왜곡 보도에 강력히 항의하여 다음 날인 31일 경향신문에는 후속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자신의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또다시 “사랑방에서는 선관위에 질의서를 전달한 상황이며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내려지기 전까지 ’쪽지넣기?를 잠정 중단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했다. 언론은 네트워크에서 주장했던 국민발의제와 국민소환제 쟁취의 민주주의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불법적인 쪽지 넣기’를 막으려는 선관위와 ‘강행’하려는 네트워크의 ‘대결’에만 초점을 맞추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을 가두어버렸다. 이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기사꺼리’에만 집착해온 보수언론의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3월 31일 문화일보는 ‘法治가 흔들리는 사회’라는 기사를 발표하면서 이후 보이는 사랑방에 대한 일관된 적대감을 표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법질서’라는 잣대만을 가지고 네트워크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주구장창 ‘탄핵반대 촛불집회’와 싸잡아 ‘투표함 쪽지 넣기 세력’을 ‘불법?불순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에게는 민주주의는 없고 오직 ‘법’만 있을 뿐이었다. 이후 국민발의제와 국민소환제를 쟁취하기 위한 일련의 공동행동들은 ‘투표함 쪽지 넣기’라는 ‘고유명사화’된 말-‘투표함 쪽지’는 한때 인터넷 ‘다음’ 사이트의 이슈 검색어 네 번째에 오르기도 했다-에 갇히기 시작했고, 네트워크는 인권운동사랑방으로 ‘대표화’되기 시작했다.(‘국민발의제와 국민소환제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의 이름보다는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한 인권 사회단체’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사랑방을 향한 항의는 거세지기 시작했다) 보수 언론들은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투표함 쪽지 넣기’를 ‘건전한 상식을 일탈한 행위’ ‘불법 행위 강행’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국민발의제와 국민소환제의 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동아일보는 4월 13일 ‘선관위 경고 무시하는 시민단체’라는 기사를 발표함과 동시에 ‘투표함에 쪽지 넣기, 무슨 짓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으면서 네트워크의 활동을 ‘쪽지 넣기’에만 한정하면서 ‘한두 차례의 이벤트’로 폄하하였다.
거의 동일한 구성의 두 기사를 다른 성격의 기사로 취급하면서 중복 발표한 것은 가히 ‘죽이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일보는 4월 14일 또다시 탄핵반대 촛불집회와 투표함 쪽지 넣기를 종합선물세트로 하여 ‘극한 운동의 절정’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의 일관됨은 이날 자 사설에서 빛을 발한다. ‘法 우습게 아는 촛불집회, 투표방해(이 얼마나 화려한 제목인가! 法이라는 글자 대신 사람 이름이 있었다면 나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투표방해’라니, 이것이야말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보도 아닌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역대 선거 중 이번만큼 법치주의 도전이 노골적인 적 있었던가. 이런저런 단체가 당국의 위법 지적, 의법 조치 경고를 묵살하고 불법행위를 더 부추기고 있다”고 하면서 “이 단체가 7개 인권?사회단체로 구성됐다니 우리는 ‘인권, 사회’라는 말조차 아깝다고 믿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투표함 쪽지 넣기’와 사랑방에 대한 문화일보의 일관된 적대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이후 법무부는 ‘투표함 이물질 투입행위에 대한 엄정 대처’를 발표하였고 심지어 조선일보에 따르면 “법무부는 투표용지에 숨겨 쪽지를 몰래 투입할 경우는 쪽지를 제작한 단체의 대표 등을 상대로 조직적인 배포 여부 등을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고 했다. “쪽지를 실제로 투입한 투표자를 찾아낼 수는 없지만, 쪽지 투입을 주도한 단체의 대표 등은 처벌할 수 있을 것”이 조선일보에서 공개한 법무부 관계자의 말이었다. 게다가 문화일보는 15일 투표 당일까지 “투표함에 정치적 요구사안을 담은 쪽지를 넣는 행위...엄정 대처할 방침”이라고 법무부의 방침을 밝히며, “각 투표소에서 투표함에 투표용지 외의 다른 이물질을 넣는 행위가 적발되면 곧바로 경찰에 인계, 형사 처벌토록 할 계획이라며 개표과정에서 발견된 쪽지에 대해서도 인쇄문구 등을 근거로 투입 행위자 추적에 나서기로 했다”고 전했다. ‘인쇄문구 추적, 형사 처벌, 엄정 대처...(지문채취까지 할 태세였다)’ 법무부&언론과 ‘투표함 쪽지 넣기’의 ‘한판 대결-일방적으로 기획된-’은 한 쪽의 ‘협박-또한 일방적인-’과 함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공포와 우려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연합뉴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랑방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법무부 발표문에는 ‘쪽지를 제작한 단체의 대표에 대한 수사 방침’도 없고 ‘경찰의 인계’라든가 ‘인쇄문구를 근거로 한 투입 행위자 추적에 대한 방침’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결국 몇몇 언론들이 추측성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보수언론의 호들갑이든 쟁점의 왜곡이든 방송 3사는 선거 관련 뉴스에서 하나같이 “일부 시민단체들이 투표함에 국민소환 등의 쪽지 넣기 운동을 벌이겠다는 것과 관련해 법무부는 개표 방해죄를 적용해 엄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는 거의 동일한 멘트를 ‘날림’으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4월 15일. 제 17대 국회의원 총선 투표일.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화창한 봄날씨에 노곤하리만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울 은평구 개표소가 마련된 불광동 한국여성개발원 강당에서는 10개 투표함에서 ‘국민발의권과 국민소환권을 요구한다’라는 내용이 쓰인 가로 8cm, 세로 5cm 크기의 쪽지가 각각 3개씩 발견됐다. 개표 관계자들은 “쪽지 크기가 별로 크지 않은데다 금방 눈에 띄어 개표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 4월 16일 0시 15분 인터넷 동아일보에 난 기사. 법무부&언론과 ‘투표함 쪽지 넣기’의 ‘한판 대결’은 한 개표 관계자의 말과 함께 맥없이 막을 내렸다. 아직 인쇄문구를 통한 투입 행위자 추적도 없고, 지문채취의 사례도 보고되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법 위반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도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성하면서도 유일한 국민의 주권행사인 투표는 이제 이것으로 끝이 났다. 이것으로 ‘국민(의)+신성한+주권행사=투표’라는 공식과도 같은 마법의 주술은 또다시 4년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