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여름 처음 출판사에 취직해 지금까지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서른 초반까지만 해도 세상은 뿌ㅤㅇㅒㅆ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봐도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갑갑했다. 직장 생활이 무르익으면서 질문은 점점 많아지는데 그것을 해소할 길은 몰랐다. 그래서 그 무렵 여기저기서 강의를 찾아 듣고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인상적인 것이 한노정연 《자본론》 세미나였는데, 비록 2권 공부하다 말았지만 그 세미나 덕에 ‘자본’의 뜻을 비로소 알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된 날엔 숨이 턱턱 막혀 자다가도 몇 번씩 벌떡벌떡 일어나 숨을 고르곤 했다. 도무지 벗어날 길 없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듯했고, 그것이 영원하리란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사랑방은 서준식 씨에 관한 기사를 읽다 처음 알았던 것 같다. 활동 내용을 검색해 보곤 단체를 믿게 되었고. 사랑방 첫인상은 돌진의 어색한 낯빛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내가 경직돼 있어서 그랬을 거란 생각. 먼저 와서 혼자 열심히 밥통을 닦던 유성과, 왜 래군에게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느냐 일침을 가하던 미류(그러게. 그 뒤로 오래 이 문제를 생각함), 얼굴이 상기된 채 자기 논리를 끝까지 차분차분 설명하던 혜영, 뭔가 좀 길게 말했던 재용 등등 첫 회의 때 사람들 모습도 떠오른다.
사랑방은, 이전에 잠깐 머물렀던 친목 성격이 강했던 단체와 달리 ‘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이러저러하게 말만 나누는 곳이 아니라 진짜 무언가 움직여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 무척 설ㅤㄹㅔㅆ다. 그러나 몇 달간 활동하면서 느낀 건 내가 시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란 거였다. 문제의식을 문제로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실천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다.
일 년간의 실직 기간을 거쳐 취업한 뒤론 사랑방에 발길이 뜸했다. 새 직장이 파주였는데, 그렇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11시까지 이어질 회읠 생각하면 부담스러웠다. 그 순간 귀신같이(?) 피곤이 밀려오기도 했다. 어쩌다 회의에 참석하는 날엔 또 서먹서먹했다. 낯선 사람들, 이미 진행된 활동 내용…. 그 자리에서 확인되는 건 나의 ‘게으름’뿐이었다. 내 게으름에 내가 낙담하고 내가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한발한발 뒤로 물러나다 돋움을 신청한 건 너무 뒤로 물러나서다. 이러다 아예 드러누울 것 같아서. 30대를 돌아볼 때 사랑방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사랑방은 나에게 많은 문젯거리를 던지고 깨닫게 해 주었다. 이 공간을 지키고 싶다. ‘운동’ 자체에 뜻을 두겠단 다짐이 더 낫겠지만 아직 내 상태는 이렇다. 인권 감수성도 여전히 낮고, 게으르고, 비관적이기까지 하지만, 이 공간에서 몸을 많이 움직여 내 머리도 무언가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