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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제46주년 기념 세계 인권선언일 기념 특집① 인권운동의 화두

나는 나의 권리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타인의 권리를 생각할 수 있는가?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일까. 신권의 시대를 지나 왕권의 시대, 그리고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금권의 시대가 천년왕국의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인권의 시대는 과연 언제 올까?

나와 너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금권의 시대는 천년 만년 그 호시절을 구가할 것 같다. 아니 인류의 역사에 인권의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예견해 본다.

인권이라 할 때 ‘인’은 ‘사람’이란 뜻도 있고 ‘다른 사람’이란 뜻도 있으니 다른 사람의 권리보다 나의 권리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고 볼 때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시대, 인권의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끔 어떤 자리에서 인권변호사 아무개라고 소개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인권이 아니라 물권변호사 아무개입니다’라고 농담 삼아 정정을 해 주기도 하지만 인권변호사라는 소개 말이 싫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 주는 시대를 만드는데 보탬을 주고 있다는 자타의 평가는 바로 나의 명예나 자긍심 같은, 나의 권리를 충족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니 결국 다른 사람의 권리는 나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나 지식이나 힘을 바탕으로 남들의 권리를 지키겠노라, 역사의 진보를 책임지겠노라 큰소리쳤지만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많은 다른 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는 일을 되풀이 해왔다.
노자는 일찌기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내가 무엇을 잘 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를 먹지 말라고 했거니와 매월당 김시습도 세상과 백성을 평안히 하겠노라고 나선 강태공을 이렇게 꾸짖었다.

“비바람 들이치는 낚시 돌 위에 앉아 고기잡이 아닌 낚시질을 하며 위수의 고기와 새에게서 때 잊고 한가히 사는 도를 배웠던 강태공아 뭐 하자고 늙그막에 벼슬이니 뭐니 해서 사나운 장군 돼 가지고 양심 지켜 깨끗이 살자는 백이 숙제는 굶어 죽게 하였느냐”

요즈음 말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권리를 나의 권리보다 더, 아니 최소한 나의 권리와 똑같이 존중해 줄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인권이니 국민이니 떠들지 말라’

다른 사람의 권리를 나의 권리만큼 똑같이 여길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구일까. 금강경에서 부처가 제자 수보리에게 설법하는 화법을 빌면 남의 권리를 위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그는 남의 권리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도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라는 고통을 짊어질 각오 없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그러한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제도를 논함은 결국 백이 숙제를 굶어죽게 하는 일밖에 더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 보장해 줄 것인가를 놓고 해방이후 50년간 남북의 우리 역사가 벌인 시행착오를 보라.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기술을 쌓는 것이 아니면 계급투쟁을 하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라고 저마다 주장해 왔다. 이제 모든 주장들이 무너지고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는 94년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위하는 인권운동을 한다는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붙잡고 늘어져야 할 화두는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나의 권리 - 여기에는 재산 적 이득뿐 아니라 명예, 그리고 선한 일을 한다는 자긍심도 당연히 들어간다- 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타인의 권리를 생각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은 그저 나의 독선일 따름이요, 내가 바람직하다고 내세우는 제도는 또 하나의 분쟁거리일 뿐이 아니겠는가?

성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종이 명령대로 했다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말하여라.”

김형태(천주교인권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