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꺽철꺽철꺽철꺽………
3평 남짓되는 방에는 온기보단 냄새로 한몫하는 난로 한 대와 시커멓게 뭉개진 인쇄폐지가 가득하고, 마스터기 1대가 폭주족보다 요란하게 돌아간다. 이윽고, 기계가 멈추고 손에 묻은 기름때를 씻으며 "영세업자에겐 시간이 돈인데…" 하며 하루일을 마감하는 강은식(47)씨! 세진인쇄소 사장님이자 인쇄기술자인 그의 첫마디가 '영세업자'이듯이 을지로 3가 깊숙한 골목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은 1년 열두달 그늘진 곳이다.
그는 77년 군제대를 하고 형님과 함께 인쇄업을 시작했다. 형님의 고향 죽마고우인 이해학(성남 주민교회) 목사와의 인연으로 재야운동판 인쇄물을 떠맡게 된 '첫발'이었다. 아마도 재야출신치고 세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내가 인쇄업에 들어온 것이 77년이니까 꼭 20년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단가가 똑같아. 이렇게 된 데에는 운동권의 잘못이 커. 한때 인쇄업에 대거 뛰어들었는데, 싸게 해준다면서 가격을 내렸지. 가격을 낮추니까 인쇄 흐름은 짜그라들고, 그러고도 계속 인쇄업을 하면 모르지만 자기네들은 빠지고, 그러니 인쇄업을 계속하는 사람들만 죽을 맛이지. 그것만 생각하면 짜증나."
친형과 나란히 서빙고로
지금은 운동권만 생각해도 이를 박박간다는데, 그가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연은 깊다.
80년 이야말로 세진의 전성기였다. 위험한 유인물을 인쇄해 줄 곳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꾸역꾸역 세진을 찾아왔다. 인쇄 단가는 지금과 같지만 일이 많으니까 돈도 많이 벌었다.
80년 김대중 씨의 시국강연회를 이곳에서 몽땅 인쇄했으니 강연회가 있을 때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인쇄물을 찍어냈다. 당장 돈을 못 받아도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 아마 지금껏 그만큼 일했으면 빌딩은 샀을 꺼라는데, 그 댓가는 컸다.
"형님과 함께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는데, 난 그곳에서 15일간 조사를 받고 다시 시경 합수부에서 5일간, 중부경찰서에서 2일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 그러나 형님은 '김재규 항소이유서'와 관련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1년6개월 가량 복역했고…"
김재규 항소이유서를 처음 찍은 곳도 세진이었고, 80년 광주항쟁의 처참함을 알리는 칼라 사진도 목숨걸고 찍은 곳도 세진이었다. 동아투위, 조선투위 당시에는 여관방에서 관련자들과 같이 자며, 필름을 빼앗겨 가며 유인물을 찍었다.
목숨걸고 광주항쟁 사진 찍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당시의 일이다. 퇴근해 집에 들어가 있는데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찍어야 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세진 아저씨는 왼편 중지 손가락을 내밀며 "이 손가락이 속살이 보일 정도로 잘렸는데, 일은 당장 해야겠고. 병원에 갔더니 마취 안하고 생살을 꿰매면 금방 아문다길래 아픈 것도 참고 꿰맸지. '휴식을 취하라'고 의사가 말했지만 그 길로 인쇄소로 와서 기계를 돌렸지. 운동판 유인물은 시간이 생명이잖아."
세진 아저씨는 "같이 살고, 같이 움직였잖아. 그럼 같이 살아야지. 저그들은 국회의원, 나는 인쇄 밑바닥. 조그만 양심이라고 있으면…" 말을 잇지 못한 그는 그저 "한이 굉장히 많다"는 말로 다음 말을 대신했다(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스터 기계 1대로 손수 기계를 돌린다. 매달 종이값, 임대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대략 2백50만원이 남는다).
당시 "삼촌"하고 아는 체하던 이들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좋은 세상이 되면 보자"던 아무개는 지금은 ㅇ시 시장이 되었지만 코빼길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와 끝나지 않은 인연은 안기부라고나 할까. 경력 덕분에 무슨 사건이 터지면 "이 유인물 여기서 찍지 않았냐"고 들고 온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국제사회주의자들' 유인물 일로 다녀왔다고 한다. 어딜 다녀왔냐고 묻자 "우리한텐 대공분실 밖에 없어. 유인물을 맡긴 사람 이름이나, 유인물 내용은 모르지. 모르는 게 좋고." 맨 처음 잡혀갔을 때는 오금이 떨렸다는데 이젠 이력이 났는지, 지금은 가면 고개를 빳빳이 든다고 한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계속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진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자리에 있다. 세월이 지났어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다. 믿음 자체가 없으면 허황된 거래밖에 없고, 믿음이 없으면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거래선이라는 것이 그의 직업 신조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기 전 "언제까지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 다일뿐 밤을 새서라도 일을 마치는 것이 그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10년 이상된 고객들이 많다. 부스러기선교회, 참여연대 등 빈민·시민단체들은 일을 맡기고 그는 거기에 매달 회비를 내는 회원이다.
"기계가 돌아갈 때가 가장 즐겁다"는 그에게 "일한 만큼 보장받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의 인쇄를 부탁해보자.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