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라키에서 불어오는 바람
(미국/1991/니시야마 마사히로 감독/91분/다큐멘터리/컬러)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이 웃음은 무엇인가? 어둡고 칙칙한 웃음이 아니라 산들바람 같은 웃음이다. 그들의 너글너글함이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져온다.
시가라키에는 약 2쳔 명의 노동자가 있으며 그 중 1백6명의 정신 지체장애인이다. 이들은 보통 10년 이상 이곳에서 직업을 얻어 살아왔다. 이 산 속의 작은 도시에 이들은 완전히 녹아들어 있다. 그들은 여기서는 전혀 새삼스러운 존재가 아니며, 일을 하고 있어도 외출을 해도 그들은 이 도시에 잘 어울린다.
그들은 ‘양호학교’를 졸업하고 이 도시에 와 2주간의 실습기간을 거친 후 취직한다. 가내공업 규모의 작은 도자기 공장들, 거기에는 ‘사람’이 있고 흙이 있다. 즉 원초적인 것과의 접촉이 있다. 그들은 이런 자연 속에서 음산한 이미지의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된다. 우리나라의 어느 장애인 마을이 ‘자활’을 말하면서 그들을 공장의 생산 라인에 투입하는 것과는 천국과 지옥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가라키 어느 공장에서 8년동안 일했다는 어느 장애인은 대단한 장난꾸러기다. 공장 사장은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처음 3년 동안은 정말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장난꾸러기 장애인 노동자를 쫓아내지 않았다. 거기에는 ‘경제’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장난꾸러기는 지금은 좀더 낫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장 말에 의하면 “나쁜 짓거리도” 가끔 한다. 영화의 이 장면을 보는 사람은 흔히 장애인 단체에서 주장하는, ‘장애인이 능력에 있어 통상인과 같다’는 주장은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경제논리에 끌려 들어간 괴로운 논리가 아니냐는 의심을 가져볼 만하다. 이 논리는 결국 장애인을 생산라인에 투입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가 좋다. 시가라키에서 만난 여러 장애인의 말들을 그대로 옮겨 모자이크한 듯한 이 노랫말은, “바람처럼 웃으면서 살아간다네”로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 정신 지체장애인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