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인권단체 진상조사단의 방문 이후, 부랑인시설 ‘양지마을’에 갇혀 있던 원생 가운데 2백여 명이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생지옥을 빠져 나온 ‘기쁨’도 잠시. 수년간의 감금생활을 끝낸 이들 앞에는 또 다른 시련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93년 3월 양지마을로 강제납치된 후 5년여만에 ‘자유’의 몸이 된 김재성(58) 씨는 요즘도 부인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고 한다. 납치된 이후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었던 까닭에 부인 한은옥(57) 씨와 생이별한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양지마을에서 나온 즉시, 김 씨는 아내와 살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번호는 결번이었고, 집도 다른 사람이 세를 살고 있었다. 김 씨는 부인을 찾기 위해 천안으로, 대구로 주민등록을 추적해 찾아가 봤지만, 부인은 또 경주로 주소를 옮긴 뒤였다. “아내를 못 찾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에 눈시울을 붉히며, 김 씨는 또다시 경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을…”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는 이수연 씨는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90년 10월 실종된 이래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외삼촌 박상식(62) 씨가 8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8년만에 만난 외삼촌은 손가락이 절단되어 있었고, 조카들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상해 있었다. 가족들은 박 씨가 다름아닌 대전시청 공무원에 의해 양지마을로 넘겨진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수연 씨는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을 8년간 망쳐놓을 수가 있냐”며 “노재중이는 물론, 파출소, 연기군청 직원 등 관련자들을 모조리 처벌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청주의 집에서 오랜만에 평화를 맛보고 있는 이상흔(57) 씨는 5년만에 돌아온 집에서 낯선 아이 둘을 만났다. 큰 아들과 딸이 낳은 손자(5)와 외손자(4)였다. 손주들의 재롱 속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속에도, 자녀들의 결혼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은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