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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집> 양심수 문제, 이제는 끝내야 한다 ①

김대중 정권, 차별화 의지 보일 때


또다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매년 8월이면 어김없이 명동성당 앞에서 진행되어온 ‘양심수 석방 캠페인’이다. 올해는 특히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묵은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드높고, 인권대통령을 표방하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만큼, 양심수 석방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여느 때보다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사면의 조건으로 등장한 준법서약제도와 3․13 사면 때처럼 보수․공안세력에 대한 눈치보기로 인해 기대만큼 사면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기대와 우려 속에 다가오는 8․15사면의 초점은 역시, 김대중 정부가 ‘양심수 전원석방’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이행할 수 있는가에 있다. 과연 김대중 정부는 역대 정권과 차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6월항쟁 직후 최대규모 석방

5공화국 이후 현재까지 가장 대폭으로 양심수 석방이 이루어진 때는 6월 항쟁 직후인 87년 7월 9일이었다.

끓어오르는 민주화 요구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에 이어 7․9 사면조치를 단행해, 당시 시국사건 관련 기결수 4백43명 가운데 3백57명을 석방하고, 3백50명에 달하던 수배자 중 2백70명에 대해 수배해제 조처를 내렸다. 그러나, 비전향장기수를 비롯한 이른바 ‘좌익사범’들과 김근태, 장기표 씨등 명망있던 민주화운동가들을 사면에서 제외함으로써 앙금은 계속 남게 되었다.

7․9사면 이후 두 번째로 대규모 양심수 석방이 이뤄진 때는 88년 12월 21일. 노태우 정권은 그해 2월 27일 대통령 취임 특사로 1백25명의 양심수를 석방하고 8․15 가석방을 통해 36명의 양심수를 풀어주는 등 여러차례 사면복권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88년 하반기 들어 국민들의 5공청산 요구가 거세지고, 특히 전두환에 대한 구속처벌 요구가 강력히 제기되자, 정국 돌파를 위해 또다시 양심수 석방 카드를 꺼내게 된다.

결국 12․21 사면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김현장, 문부식 씨 등 2백81명의 양심수를 석방하고 수배자 61명에 대해 전원 수배해제 조처를 내렸다.

물론 이때의 사면 역시 각계의 요구에 턱없이 못 미쳤으나, 다만 노태우 정부가 양심수 문제에 대한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한 점은 주요한 선례로 남게 된다.


노태우 정부, 미결수도 석방

노태우 정부는 당시 기결수들에 대한 석방과 수배해제 조처 외에도, △수사중인 30명에 대한 구속취소 △재판 계류중인 1백23명에 대한 구속취소 청구 △김덕룡 씨등 14명에 대한 공소취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는 현 김대중 정부가 기결수만을 대상으로 사면 논의를 진행중인 것보다 오히려 전향적인 태도였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국민의 기대를 가장 많이 배반한 정부였다. 김영삼 정부가 양심수 석방 시늉을 보인 것은 93년 3월 6일과 95년 해방 50주년 기념 특사 때. 그러나 각각 144명과 25명의 양심수만을 석방했을 뿐, 대폭적인 양심수 사면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정권과 다름없이 국가보안법, 집시법 등을 통해 숱한 양심수를 양산해 냄으로써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김영삼 정권이었다.


8․15 특사, ‘인권의지’ 판가름

김대중 정권은 올해 3월 13일 양심수 문제에 대한 첫 시험대에 오른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풀려난 양심수는 고작 74명. 민가협이 집계하고 있던 478명의 양심수 가운데 15%에 불과한 수치였다.

8․15를 앞둔 지금의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와 달리 “보수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 시점에 와 있다.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8․15 사면의 결과는 김대중 정부의 ‘인권의지’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