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특별기고> 제주 4.3과 미국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대가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제주 4․3'이 발발했다.

그후 6년 6개월 동안의 전개과정에서 젖먹이부터 60대 이상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3만명이 토벌대에게 잔혹하게 학살됐는데, 대부분의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 경부터 약 4개월간 이른바 '초토화작전' 때 벌어졌다.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반인륜적 범죄이며 공소시효도 없는 전범(戰犯)으로 취급받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초토화작전을 명령했는가. 이에 대한 책임은 우선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에게 있다.

그런데 취재반은 10여년 동안 '제주4․3'을 조사해 오면서 차츰 미국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고, 초토화작전 역시 미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4․3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미 국무부 관리로 있는 존 메릴 박사는 취재반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책임을 부인했다. 존 메릴의 주장인 즉, "4․3이 미군정 시절에 발발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실책은 인정한다. 그러나 대량 인명희생을 몰고 온 초토화작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현재 4․3과 미군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보고서인 「G-2 보고서」, 「CIC(방첩대) 보고서」, 「PMAG(임시군사고문단) 문서」 등이 있다. 이들 문서는 제주 상황을 시시콜콜 다루고 있지만 초토화작전 시기에 이르면 그 내용이 누락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들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초토화작전에 관한 미군의 역할이 드러난다. 지면 관계상 한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모든 장비와 지원, 그리고 계획된 작전은 최소한의 미군 개입으로 적절한 지휘계통을 통해 한국인에 의해 조종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 9연대 작전에 대한 모든 전술․병참 지원 업무를 5여단에 위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5여단은 적절한 지원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미군 고문관들이 한국인 채널을 통해 즉각적인 수정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PMAG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1948. 10. 9.)


초토화작전을 명령한 자는?

이 보고가 있은지 이틀 후,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그 사령관에 광주 주둔 제5여단장을 임명했다. 토벌 지휘자가 연대장 급에서 여단장 급으로 격상한 것이다. 다시 6일 후에는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송요찬 9연대장의 포고문이 발포됐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으로부터 5km 지점'이란 특정한 산악지역이 아니라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른바 '중산간 마을'이 해당된다. 중산간 초토화작전이라는 가공할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이같은 계획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된 계엄령으로 본격화된다.

이처럼 ①미군 고문관, 제주작전에 즉각적 수정조치 요구(10월 9일)→②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10월 11일)→③송요찬의 포고(10월 17일)→④이승만의 계엄령(11월 17일)이란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데 어떻게 미군이 한국군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을까. 이는 당시 주한미군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따져볼 때 금방 드러난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장군 사이에 비밀리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이 1949년 6월 말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에 대해 전면적인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