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려났어? 안 풀어주기만 해봐. 내가 오늘밤에 이것들(철조망) 다 뜯어버릴 거여. 국민들을 잘 살게 해 줄 생각은 안하고… 다 지옥 갈 줄 알아. 내가 죽을 때 다 데리고 갈 꺼야"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매향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최 노인(84)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찾아올 거라 믿었던 평화는 이번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국방부와 미군은 1일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달 8일 발생한 매향리 주민들의 피해는 미군의 오폭사고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 매향리 사람들을 집단적인 거짓말쟁이로 매도했고, 싸움을 이끌었던 전만규 위원장은 '폭격신호를 내리는 미군의 깃발을 찢어버린 죄'로 경찰에 연행돼 유치장안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폭격은 다시 시작됐다.
2일 오전 8시 50분경. "두두두두두"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미군의 헬기 한 대가 쿠니 사격장 주변을 상회하더니 폭격연습을 알리는 주황색 기가 올랐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40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주민들이 사격장 앞에서 미군과 정부의 조사결과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자 A-10기 2대가 날라 와 보란 듯이 폭격을 재개했다. "쾅, 쾅". 연이은 폭격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기자들은 차 뒤로 몸을 숨겼고 주민들은 경악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순간 전만규 위원장이 미군 사격장 안으로 몸을 날려 사격을 알리는 주황색기를 찢어버렸다. 당황한 경찰은 잠시 머뭇거리다 전 위원장을 연행했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손쓸 겨를도 없이 경찰차에 실려 화성경찰서로 이송됐다.
그렇게 전 위원장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오후 5시경부터 대책위 사무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8시 무렵엔 40여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로 대책위 사무실이 가득찼다. 80년대 후반 한 차례 싸움이 벌어졌던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10개 부락의 대표가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전 씨한테 다 맡겨왔어" "그러니까 경찰들이 전 씨만 잡아가면 다 끝나는지 알지. 이참에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해" "테비(텔레비젼)고 신문이고 매일 매향리 매향리 하던데 왜 끝이 안나는가 모르갔네. 정부 새끼들이 죽일 놈이여. 지네 국민들은 매일 죽겠네 하며 사는데, 뭐라고? 미군폭격이랑 주민피해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씨발" "참말로 죽든 살던 이젠 끝을 내야 혀. 더 이상 이러고 어떻게 살아. 이건 죽은 목숨만도 못해"
피해자이면서도 큰소리 한번 못 냈던 주민들의 입에서 50년간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분노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결의로 이어지면서 주민들은 3일 오전 10시 화성경찰서 앞에서 7백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갖고, 전만규 위원장의 석방을 촉구하기로 했다. 또 오는 6일 진행될 매향리 사격장 인간띠잇기 행사에 주민 모두 참여하기로 했다.
3일 새벽 1시, 주민들이 다 떠난 대책위 사무실에 임시 위원장을 맡게된 최용운 씨가 찾아왔다. 속상한 마음에 술 한잔 걸쳤다는 최 임시위원장은 "갈 때까지 가보렵니다. 이제 내 머리가 깨지든, 정부 놈들 머리가 깨지든 한판 붙어야할 때가 온 거죠"라고 말했다. 폭격이 다시 재개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그의 말속엔 폭격 소리보다 더 큰 매향리 주민들의 50년 간의 절규가 배어있었다.
이날 경찰과 정부 관계자들의 움직임도 부산했다. 주민들의 시위 계획을 탐지한 경찰과 화성군수, 국방부 관계자 등은 각 마을 이장들에게 "3일 낮 12시 음식점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걸며 회유를 시도했다. 또 대책위 사무실 주변을 비롯한 마을 곳곳에 70여 명의 사복형사들이 배치돼 주민들을 내내 감시했다.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