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20주년을 맞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다시 변혁을 꿈꾸는 인권운동의 질문을 담아 책자를 발간했다. <인권오름>은 그 중 '도란거리다' 장에 실린 글의 일부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일상, 관계, 활동 속에서 어제의 고백이기도 하고 내일의 다짐이기도 한 사랑방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인권오름> 독자들에게도 든든한 기운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의문들을 더 이상 묻어두기 어렵다. 보았으나 지나쳤던 것들. 지나치면서도 한편에 생겨버린 의문들. 찜찜하면서도 묻어두었던 것들.
국가보안법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국가보안법 대응을 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또 ‘민주 정부’ 10년을 거치며 사법부가 일정하게 제어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고민할 필요를 그리 못 느꼈다. 국정원이 테러방지법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걸 보며, 이 공안 체제는 ‘빨갱이’ 대신,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악마화하기로 전략을 바꾼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보안관찰제도가 또 하나였다. 국가보안법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무한정 보안 관찰 처분이 갱신되며 사실상 죽을 때까지 국가로부터 감시 사찰을 받는다. 폐지된 줄 알았던 제도가 엄연히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뭔가가 어긋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하면 ‘시대착오적’이랄까. 그러나 이전에는 아주 가끔씩, 옛 운동권 인사들의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도 보안 관찰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지나가듯 언급될 때에나 떠올릴 뿐이었다.
1990년 윤석양 씨의 양심선언으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폭로되고 기무사로 이름을 바꿔 단 역사를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의문은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안 하나?’였다. 당시 국방부는 ‘법원에서 증거 보존 절차를 거친 자료를 제외하고는 전부 폐기 조치’하고 앞으로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누가 확인했지? 지금은 누가 확인하고 있지? 하지만 기무사라는 이름 자체를 들어볼 일이 별로 없다 보니, 그냥 그러고 말았다.
집회․시위의 권리와 경찰 폭력 문제에 대응하며, 서서히 하나의 문제의식이 생겼다. 군사 정권이든 민주 정부든, 정권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물밑에선 일관되게 관통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전․의경 제도 폐지에 대비하기 위해, 야간 집회에 대응하기 위해 등 이유야 그때그때 달라졌지만, 경찰의 물리적 시위 진압 능력은 일관되게 증강되고 있었다. 집회 시위의 양상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순해졌는데도 말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경찰의 물대포와 차벽 전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들고 나왔던 시민 한 명 한 명 식별해 추적한 후 처벌하는 능력도 하루아침에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그런 힘을 키워왔다.
2008년 촛불 집회에서 기무사가 민간인을 사찰해 왔다는 게 드러났고, 검․경이 여전히 공안 사범 명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시대착오적 행태라고 비판했지만, 갈수록 내 안에서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커져 갔다.
그 후 지금까지, ‘오래된’ 많은 것들을 다시 보고 있다. 보란 듯이 감행된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30여 년 만의 내란음모죄, 한국전쟁 후 처음이라는, 난생 처음 듣는 여적죄까지. 국가의 무기고는 참으로 깊구나 싶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낡은’ 망령이 ‘부활’하였다는 식의 설명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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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석기 의원 사건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끈 건 두 가지였다. 모임에서 누군가 말하였다는 ‘예비 검속’이라는 단어. 그리고 ‘정전협정 백지화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매우 심각해진 상태에서 행해진 올 3월 독수리훈련과 키리졸브 훈련 중에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건물 옆 골목에 1개 소대 병력의 군인이 배치되고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여러 명의 군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일이 있었다.’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주장.
청명계획이 떠올랐다. 87년 항쟁 직후인 89년 3월, 보안사는 계엄령 발동 등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며 청명계획을 준비하였다. 민주화 운동 인사들 900여 명을 비밀리에 사찰하다 계엄령 발동과 동시에 잡아들이는 예비 검속 계획이었다. 그 해 8월에 있었던 을지훈련에서 도상 훈련이 실시되었다. 계엄령과 쿠데타는 실행되지 않았으나, 이때 만들어진 예비 검속 명단은 이후 1,300명으로 늘어나며 민간인 사찰에 활용되었다. 90년 윤석양 씨가 폭로할 때까지.
당시에는 민간인 사찰만이 폭로되었지만,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로 청명계획의 윤곽이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 말기였던 그때까지도 기무사는 그 명단을 갖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명박 정권을 거쳐 육법당의 현 정권이 들어선 지금, 그건 이젠 정말 폐기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친위 쿠데타와 예비 검속을 음모한 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어디에서 뭘 해왔고 또 하고 있나. 계승 발전되는 건 어느 쪽이고, 정리되고 청산된 건 되레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목소리로 어떤 이들이 말한다. ‘이석기 사건’으로 드러난 건 극단주의자들의 적대적 공존 관계라고. 진실의 일부가 담겼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제3자적 위치가 의심스럽지만.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한다, 글쎄. 어떤 시대, 어떤 현실 말인가?
이번 사건의 실체적 성격이 무엇인지 난 아직 모른다. 저항과 반역의 사이 어디쯤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국정원조차 계속해서 새로운 혐의를 추가하는 건, 사상-표현-실천의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 스펙트럼의 어디를 특정할지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그럼에도, 이 군사화된 경찰국가와 ‘제국주의 전쟁광들’에 대한 저항과 적대의 뜻을 분명히 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아마 국가의 보복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군사반란 학살자 전두환에게 육군사관학교의 사열을 바치고 있는 이 국가가, 반역죄를 물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감한 듯 털어놓은 이면의 불안을 안고 살던 이들에게, 국가의 폭력 앞에선 연약한 개인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과연 ‘네 사상을 고백하라.’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다그치는 게 먼저일까.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딛고 선 발밑엔 무엇이 있던 건지, 헛갈리기 시작하였다.
덧붙임
유성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