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든가. 한겨레21 고아무개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한겨레21 맨 앞에 실리는 이주의 세상인가 하는 지면을 방담면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나더러 세명 정도로 사람을 짜달라는 얘기였다.(참고로 말하면 그 즈음 시사주간지들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89년 시사저널의 성공으로 선데이서울의 시대를 마감시켰던 시사주간지들은 이른바 386이라는 고정독자층의 노화와 새로운 독자층이 재생산되지 않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감옥체험에서 만나 친해진 김어준을 기본으로 놓고 이사람 저사람 생각을 해봤는데 이를테면 진중권은 데스크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 곤란해 했고(이런 평가는 진중권과 나를 동시에 불쾌하게 만든다), 임지현은 국제 좌파 아카데미즘에 전념하느라 개근이 어려웠다. 다른 아무개는 말이 너무 어려웠고(이런 유형은 대개 무슨 말인지 자신도 모른다) 다른 아무개는 말에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김어준과 둘이 시작한 쾌도난담은 시작하자마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김지하 선생의 좌충우돌을 "앵벌이하는 상이군인"이라 표현한 덕에 나는 한국에서 가장 싸가지 없는 인간이 되었고 잘 나가는 부르주아 시민운동을 비판한답시고 "교수나 변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좌파는 누가 못하냐" 비아냥거린 덕에 몇 명의 친구를 잃었다. 막역한 후배와 밀실에서 나눈 대화가 멀쩡한 시사주간지에 3면이나 생중계되는 쾌도난담의 기본 구조는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다.
쾌도난담으로 나를 안 사람들은 나를 처음 만나면 말하곤 했다. "생각보다 점잖은 분이시군요." 빌어먹을, 내가 왜 매주 한번씩 빤스를 벗어야 한단 말인가. 입버릇처럼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쾌도난담에 설정된 한겨레의 사업적 욕망 덕에 이미 가볍게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내가 쾌도난담에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된 건 시작한 지 반년이 더 지나서였다.
쾌도난담이 가진 나름의 쓸모는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인탤리보다는 비인탤리에게, 그러니까 중앙보다는 변두리에 있었다. 일년 가야 책 한 권 안 읽는 '진보지식인'인 나와 그 흔한 학생운동 이력조차 전무한 '386 총수' 김어준의 근본 없는 말들이 한국 사회의 지적 주변부 영역에선 적어도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보다는 쓸모가 있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반성했다. 이른바 한국 지식인들의 자족성을 줄창 씹어대면서 그 일부의 격려에 침을 흘려온 나의 짧은 '지식인 이력'에 대해 말이다. 당대의 작고 큰 진실들은 대개 변두리에 있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