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눈에 생기를 담는 길
아이들은 부모를 잃어버리면 당황해서 갑자기 백지처럼 기억이 텅 비어 버려 부모가 아무리 일러준 주소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미아가 된다고.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한 아이와 마주쳤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아이는 4살쯤 되어 보였다. 나는 아이보다 어쩌면 더 애타는 심정으로 보호자가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아이의 부모인 듯한 여성이 저 계단 위쪽 벽에 몸을 숨기고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위치여서 아이는 계속 허둥대며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아이가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갈 때까지 지하철도 놓쳐 가면 지켜보았다. 한 20여분이 지나자 그 여자가 아이에게 나타났으나 아이를 껴안아서 달래는 것은 고사하고 겁에 질린 아이를 꾸짖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엄마 말을 안 들을래?"부터 "웬수같은 ×"라는 둥, 도무지 4살박이 아이가 이해할까 싶은 말을 마구 늘어놓으며 이것도 모자라 울지 말라고 아이를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렸다. 달려가서 그 여자로부터 아이를 빼앗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단지 분노의 수위만 높이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무 것도 개입할 수 없었고 개입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이 법으로 처벌받게된 마당에. 여성운동을 하며 가족이 얼마나 여성이나 아동, 노인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하는 공간인가를 아는 내가... 무기력하게 돌아선 내가 오늘도 떳떳치 못하다. 달려가서 악다구니라도 쳐 줘야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어제 TV의 한 프로에서 부모라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아동학대가 다뤄졌다. 도무지 사람이 했을까 싶은 만행이 아이들의 몸에 심한 상흔으로 담겨있었다. 정말 이럴 수가 있는지... 이제 아이들이 불쌍해서 눈물만 뚝뚝 흘릴 일이 아니다. 절대로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없는, 되어서도 안 되는 범죄고 죄악이다.
여기에는 뿌리깊은 연령차별의 유교적 전통이 교묘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의 연령차별에 수 없이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른공경'의 미덕 앞에서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생님들의 부당함에 대들 수 없는 것, 전철에서 아무리 큰소리로 전화하는 할아버지는 봐도 잠자코 있어야 하는 것, 어쩌다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면 "패륜아"로 지목되기 일수이다. 연령차별의 극단을 보여주는 아동학대에 해결은 짓밟힌 아동의 인권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연령차별에 둔감한 우리들의 인권 민감성을 키우는 계기로서도 중요하다. 그 아이들의 눈에 생기를 준다는 것은 단순한 아동보호가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존중'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권의 출발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