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한국 입국한 재일동포 리씨 사연
지난 12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조선적 재일동포’(아래 조선적) 리OO 씨! 이번 방문으로 리 씨는 한국을 세 번째 방문하게 됐다. 남북분단과 재일동포사회의 분열로 인해 조선적들은 애초부터 한국정부가 보호해야 할 동포의 범주에서 제외됐고,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조선적에게 입국기회를 사실상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 씨의 한국방문이 세 번째라는 사실은 분명 이례적인 것이다.
이번에 리 씨가 입국하게 된 계기는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대표 양영미, 아래 KIN)이 조선적을 포함한 재일조선인 청년 20명을 서울로 초청하는 한국체험 프로그램을 추진했기 때문. 리 씨는 이 프로그램의 동경책임자를 자임해 KIN의 공식적인 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리 씨의 이번 입국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적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영사관 측으로부터 임시여권에 해당하는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한다. 이때 영사관 측은 보통 조선적들에게 국적전환을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는다. 리 씨는 KIN의 초청장을 가지고 어렵사리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리 씨는 이 과정에서 “「국적전환을 하지 않는 이유서」를 작성”해야 했고,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온갖 개인정보를 영사관 측에 제공해야 했다”고 밝혔다. 리 씨는 “영사에게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 직업, 주소, 졸업 학교 등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대단히 불쾌한 일”임을 강조했다. 이런 절차가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사실 이번 KIN의 한국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조선적은 리 씨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뿐이었다. 애초 10명이 넘는 조선적이 한국에 방문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의외로 초라했다. 이에 대해 리 씨는 “많은 조선적 들이 한국에 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설명했다. 조선적들은 한국에 오면 ‘안기부’가 국가보안법을 뒤집어 씌워 자신들을 잡아갈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또 리 씨는 대부분 조선적들이 ‘일생에 단 한 번 밖에는 한국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는 과거 영사관이나 영사관 업무를 대리했던 ‘민단’에서 두 번째 입국을 희망하는 조선적들을 대상으로 보다 본격인 국적전환 요구를 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많은 조선적들이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 그 때 가겠다”며 이번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리 씨는 설명했다.
리 씨 외에 이번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다른 조선적의 경우에는, 이후 한국에 오지 못할 각오를 했기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한국에 있을 때는 항상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까 봐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리 씨의 아버지는 제주 4․3 항쟁이 진압될 당시 목포를 거쳐 광주로 피신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는 평소 그토록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결국 조선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86년경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리 씨는 아버지가 피신했던 발자취를 거꾸로 되짚어 보겠다며, 광주, 목포, 그리고 제주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느껴보고,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싶다고 했다.
60만 재일동포 중 15만에 해당하는 조선적의 대부분이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출신이다. 따라서 부모님의 고향을 방문해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애쓰는 리 씨의 모습은 어쩌면 조선적들이 그토록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들이 ‘조선’이란 국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도 자신들의 뿌리가 남과 북이 갈라지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 씨는 “통일이 되기 이전에는 남도 북도 조국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리 씨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한국을 방문해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했던 조선적이 존재했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리 씨 같은 사례들이 쌓여 거대한 흐름을 이룰 때, 조선적에 대한 입국장벽은 비로소 허물어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