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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2] “중국인이라고 밝히면 시선이 달라져요”

‘대졸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 한경훈 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던 [삶_세상]이 이번 호부터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삶_세상 2]로 새롭게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누구나 ‘차별은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차별 현실에 대해서는 눈 감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_세상 2]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차별받는 나', '차별하는 나', 그리고 '차별하는 사회'와 마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경훈(가명) 씨는 지난 14일 중국으로 ‘쫓겨났다’. 그의 국적이 중국이니 ‘귀국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7년 동안이나 살아온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은 경훈 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은 ‘전문직 외국인노동자’만을 원한다고 했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난 조선족, 즉 재중동포인 경훈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까지 얻었지만 결국 ‘외국인’이자 ‘저학력’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경훈 씨가 출국하기 하루 전,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족 학생들을 만나면 그냥 싸웠어요”

“‘만주’라고 알려진 하얼빈에서 태어났어요. 어렸을 땐 주로 조선어로 조선족 친구들과 놀았는데, 친하게 지내던 한족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애 집에 자주 놀러 가기도 하고 걔네 부모님도 잘 해주셨는데, 소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조선족 학교로 가고 그 친구는 한족 학교로 가면서 잘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우연히 길에서 그 친구와 마주쳤는데, 그 친구가 내 인사도 안 받고 침을 뱉으며 지나갔어요. 나도 참지 못하고 쫓아가서 싸웠죠.”

경훈 씨는 그 친구와 싸운 후 다시 만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며 지금도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조선족 학교에 다니면서 한족 학생들과 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학교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갈 때 한족 학생들이 길을 막고 못 가게 해서 싸우기도 하고, 한족 학생들이 조선족 학교에 와서 돌을 던져 학교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을 테고.

“그 당시 민족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있기나 했나 싶어요. 그런데도 한족 학생들을 만나면 그냥 싸워요. 한족들은 어쩌고 저쩌고, 조선족들은 어쩌고 저쩌고, 서로 그런 말들을 하고.”


경훈 씨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2001년 한국으로 오게 됐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일단 한국에 가서 일 하면서 돈을 벌면 공부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가족들이 권유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면서 중국 돈으로 6만 위엔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그때 당시 대략 900만 원 정도 돈을 썼어요. 아는 사람을 통해 들어와서 부동산 담보 잡힌 거 빼고 그 정도 돈을 쓴 거죠. 어떤 비용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비행기 교통비, 어학연수원 입학금 그런 거였을 거예요.”

중국에서 6만 위엔은 매우 큰돈이다. 중국의 대학 등록금은 대략 1년에 7천 위엔(약 90만 원) 정도. 한국의 대학 등록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금액이지만, 중국에서도 경제가 발전했다는 광둥 성에서 일하는 공무원의 월급이 1천 위엔(약 13만 원) 정도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돈이다. 경훈 씨가 한국으로 공부하러 오는 것이 그의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경훈 씨의 어머니가 경훈 씨보다 먼저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으로 오기 1년 전에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일하러 오셨어요. 중국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남아있는데, 하얼빈에는 아버지 혼자 남아 계시고 동생은 상하이에 일하러 가있죠. 어머니는 지금도 서울에서 식당, 가정부 같은 일을 하고 계신데, 같이 서울에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자주 보지는 못했어요. 3주에 한 번 정도?”

“등록금 벌려고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어렵게 어렵게 부동산을 담보로 잡히고 6만 위엔을 모아 한국에 왔지만 한국의 대학 등록금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학년 때는 학교 다니면서 돈 벌어서 등록금을 마련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평일엔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주말엔 ‘노가다’ 뛰면서 돈 벌었죠. 그때 공부를 제대로 못 해서 학점이 정말 안 좋아요.(웃음) 그때는 돈이 없어서 집에 있던 동전을 긁어모아서 라면 사먹고, 용역회사 사장한테 차비 빌려서 일하고 와서 차비 갚고 그랬어요.”

경훈 씨는 아르바이트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다. 유학생의 경우 아르바이트 시간이 일주일에 20시간 이하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휴학을 해서 돈을 벌 수도 없었다. 제도적으로 유학생들이 휴학을 할 수는 있지만 휴학 상태에서는 한국에 남아있을 수 없다. 휴학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올 경우 교통비도 문제지만, 물가 수준이 다른 중국에서 돈을 벌어서 한국의 비싼 등록금을 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불법체류’뿐이었다.

“등록금을 벌어야 해서 휴학을 했는데 비자 연장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년 반 동안 ‘불법체류’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복학해서 6개월 동안은 ‘불법체류’ 상태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불법’인줄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죠. 학교는 계속 다니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휴학한 후 마산에 있는 알루미늄회사에서 두 달 동안 일했어요.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7시까지 일주일에 6일 일했는데 한 달 월급이 110만원이었어요. 가끔 야근도 했고. 보통 처음 들어오면 150만 원 정도 받는데, 사장님이 나는 초짜라서 경험도 없는데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적게 준다고 했어요. 한 달 지나면 10만 원 더 주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그만 뒀어요.”

경훈 씨는 그 후 3달 동안 가락시장에서 15~16시간씩 야간에 야채 나르는 일을 했다. 살던 집에서 가락시장까지 왕복 3시간이 걸려, 거기서 일하던 3달 동안은 잠자고 일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일도 그만 두고 페인트 회사에 다시 취직을 했다.

“페인트 수지 만드는 과정에서 신나에 수지를 씻어내곤 하는데, 고무장갑을 주고 씻으라고 해요. 근데 고무장갑을 끼고 씻으면 고무장갑이 다 녹아버리죠. 그래서 그냥 맨손으로 했어요. 나중에 손에 묻은 페인트를 씻을 때도 신나에 씻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일 하고 12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래도 그게 중국에서 온 산업연수생보다 많이 받는 거였어요.”

대학 졸업자는 취업이 안 된다는 출입국사무소 ‘내부지침’

‘불법체류’를 하면서 돈을 벌어 다행히 학교는 다시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불법체류’ 상태에서 계속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다.

“목동출입국사무소 가서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했는데, 당장 중국으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당시 한국에 와있던 숙모랑 삼촌에게 이야기했는데, 삼촌이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막아줬어요. 그때 360만 원 정도 들었어요. 벌금이 260만원 정도였고 100만원은 정확히 누구에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준 돈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출입국사무소에 가니까 담당 공무원이 같은 사람이었는데 바로 비자를 해주더라고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경훈 씨는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취직해 살고 싶었다. 중국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한지 이미 7년이나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도 적응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올해 졸업 후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게 됐다.

“취업을 하고 나서 비자를 바꾸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갔는데 출입국에서 취업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어요. 한국은 전문직 외국인만을 원하기 때문에 인문계 대학 출신의 경우 석사 이상, 이공계의 경우 학사 이상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출입국 상담원 말이 중소기업이나 영업직으로 취직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난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취직이 무효가 되고, 그 후 바로 중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어요. 3월 9일인가 10일에 그 사실을 알았는데 비자 만료가 15일이었거든요.”

인문계의 경우 석사 이상, 이공계의 경우 학사 이상만 취업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은 법으로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동출입국관리사무소(아래 출입국사무소) ‘내부지침’이었다. 이 외에도 외국인의 경우 75개 업종만 국내 취업이 가능한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 역시 출입국사무소 내부지침인데,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미리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이 없다. 심지어 출입국사무소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이러한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내부지침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기 때문에 출입국사무소로 미리 문의를 해야만 알 수 있다는 게 목동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이다.

외국인의 국내 취업 업종과 자격을 제한함으로써 국가의 입맛에 맞는 노동자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내부지침’에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이 좌우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내부지침의 내용을 미리 인지하고 참고할 수 있도록 공개하지 않는 것도, 지침 자체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외국인이 아니라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정책이라면 과연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외국인은 한국에서 취업을 포기하라. 아니면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거나.’라고 하는 게 솔직한 말일 것 같다.

“중국인이라고 말하면 사람들 시선이 달라져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느꼈던 불편한 점은 없었냐는 질문에 경훈 씨는 “내가 먼저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중국 조선족이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 시선이 달라져요. 아저씨들 중에는 ‘중국놈’, ‘니네 중국은…’ 이러면서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할 땐 나이가 어리고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일을 더 시키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내가 중국인이라는 걸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서 잘 안 밝히려고 했어요. 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중국 욕을 한다든가, 중국 사람들이 한국 욕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나빠져요.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를 ‘중국인’이라고 밝히는 것도 그렇고. 어떤 사람들은 배려한다고 생각하고 ‘여기 중국분이 계신데…’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도 불편해요. 한국인들과 있을 땐 중국인으로서, 중국인들과 있을 땐 조선족으로서 불편함을 느끼는데, 왜 굳이 그런 구분을 해야 할까 싶기도 해요.”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하고 구별하는 행위가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만,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그 행위의 결과가 위계를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그 자체가 차별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편견이나 경제력에 근거한 중국에 대한 우월의식은 ‘중국’과 ‘중국인’이라는 ‘단순한’ 구분 자체를 차별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경훈 씨가 상황에 따라 중국 국적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점이나 중국 국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밝혀졌을 경우 느꼈던 불쾌함이나 근본적으로는 중국과 중국인을 차별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관념의 맥락 위에 있다. 또한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 역시 한족과 조선족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상황적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가 발생한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념은 그 실체가 막연해 보이기도 하고 또 중립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특정한 맥락 속에서 구체적인 차별 상황을 만들어낸다.

“가능하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면서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하던 경훈 씨. 경훈 씨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었던 경훈 씨는 한국에서의 지난 7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