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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시효는 없다, 반인도적 국가범죄! ⑤

한국도 '중대한 국가범죄'엔 공소시효 배제했다


"기존의 법에 의하여 형성되어 이미 굳어진 개인의 법적 지위를 사후입법을 통하여 박탈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급입법은 개인의 신뢰보호와 법적 안정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국가 원리에 의하여 헌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 즉 기존의 법을 변경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심히 중대한 반면에 그 법적 지위에 대한 개인의 신뢰를 보호하여야 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96년 '5.18 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의견 중)

한국사회는 79년 12.12 군사반란과 80년 5.18전후 내란행위를 처벌하는데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실 두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없이 93년 집권했던 김영삼 정권조차 초기에는 처벌에 미온적이었다. 94년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군사반란을 인정하고도 기소를 유예했으며, 5.18전후 내란사건에 대해서는 95년 7월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민중들의 분노와 투쟁은 활화산처럼 폭발했고, 그해 말 김영삼 정권은 반란과 내란의 수괴였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등을 구속하게 됐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5.18 특별법'을 제정해 반란과 내란의 핵심세력을 처벌하려 했으나, 곧바로 공소시효를 둘러싼 법리적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반란과 내란에 관여했던 장세동 씨 등이 "죄형법정주의와 소급(효)금지원칙에 위배된다"며, '5.18 특별법(아래특별법)'에 대해 위헌제청을 한 것. 특별법 제2조는, 전두환, 노태우가 재임했던 93년 2월 24일까지를 국가의 소추권 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하는 기간으로 보고, 두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켰다.

이에 96년 2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가벌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공소시효에 관한 규정은 원칙적으로 (죄형법정주의의) 효력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특별법이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두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성됐다면 '특별법은 소급금지원칙에 위배된다'는 재판관 5명의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4명의 의견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위헌결정 정족수 6명에 이르지 못해 특별법은 합헌결정이 내려졌다.

비록 소급금지원칙과 관련해 합헌의견이 소수였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헌정질서파괴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히 했다. 헌정질서파괴범죄는 중대한 국가범죄의 하나로,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왜곡된 역사가 비로소 바로 서는 순간이었다.

한편, 35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대대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따라 국회는 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아래 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구성해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을 시작했다. 처벌법 제29조는 반민족행위의 공소시효를 50년 9월말까지로 정했으며, 제30조는 해방 이전의 반민족행위에 대해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처벌법은 명백히 소급입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당시 소급입법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고 해방 직후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일제 파시즘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전범으로 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비록 '반민특위'는 1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산당했지만, 일제 파시즘에 협력함으로써 중대한 국가범죄에 동참한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선례로서 적극 평가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