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 헌법재판관 여러분들이 ‘합헌’ 판결을 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처벌로 인해 현재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고 서울 남부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태준입니다. 수감된 처지라 다소 날벼락처럼 최근의 병역거부 관련 판결을 접해들었습니다. 솔직히 많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치권이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 입법 의지를 보이지 않고, 이미 이명박 정권 초에 백지화된 대체복무의 기억이 있어서 헌재가 단독적으로 전향적이고 진보된 판단을 내리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었지요. 다만, 그래도 최소한 같은 내용으로 진행됐던 2004년 판결보다는 후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이어진 평화수감자의 감옥행, 국제 사회의 권고, 국내 여론의 변화 앞에서 재판관 여러분들도 입법 권고를 했던 2004년 판결만큼의 결정을 내려주는 센스와 이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결과는 ‘대실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엔 자유권규약 위반에 대한 권고 조치를 여러 번 받은 나라의 재판소로서, 이미 법리상으로도 헌법적 기본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는 여론과 의견이 빗발쳤던 지난 시간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입법 권고마저 철회하고 냉전적 안보논리만을 반복한 이번 판결은,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럴 거면 무엇 하러 공개 변론을 하고, 무엇 때문에 판결을 몇 년 동안 보류했나 모르겠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헌법재판소가 현 시점에만 해도 다양한 신념과 양심상 이유로 감옥에 갇혀있는 800여명의 청년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방치해두려고 한다는 것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네요.
사실, 이제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태양 씨의 병역거부 이후 병역거부와 평화적 의무 선택에 대한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 이어진지도 10년입니다. 10년의 역사 동안 ‘평화 지형도’의 모습과 조건도 달라졌고, 따라서 이 사회에서 병역거부권이 갖는 함의도 분명 달라진 점이 있겠지요. 비단 개인의 양심의 자유 인정 여부를 넘어서 보편적 평화를 요구하고 만들어가는 문제에 우리 사회가 큰 과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그 핵심 키워드는 평화군축과 군비증강 중단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법리 논쟁’에 평화가 기댈 것이 별로 없습니다. 평화공존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지금, “법은 죽었습니다.” 현실의 변화를 가로막고 낡은 사고와 관습을 강요하는 유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큰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금의 정세 속에서 헌재가 그 걸음의 발목을 잡고 놓지를 않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를 운운하셨더군요. 그 문제, 한번 툭 터놓고 이야기 해봅시다. 지난 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희생과 죽음을 두고 보복과 확전을 일갈하는 요구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밟아놔야 한다’는 식의 논리였지요.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는 국방부와 정치권의 결사 응전 레토릭이 이어졌지만, 결국 대화와 정치적 합의 외에는 다른 해결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무력 충돌은 최소한으로 줄이되 문제의 원인과 이후 결과는 철저한 소통과 합의로 이행되어야 하고, 그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무력적 위협과 긴장감이 덜하면 덜 할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근래의 대북 정책 변화와 분위기 전환도 이와 같은 평화적 원칙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입증합니다.
왜 평화적 수단만이 평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걸까요? 그것은 군사 일변도 정책만으로 한반도를, 더 나아가 동북아 질서를 재편하고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우익들이 그토록 전쟁 레토릭을 부르짖었건만, 막상 전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하고 위험천만했던 이유가 바로 동북아의 특수한 질서 때문입니다. 헌법재판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동북아 문제에 개입된 국가들은 모두 군사력 규모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들입니다. 무엇보다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중이 가장 미묘한 기류를 순간순간 흘리는 지역도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전쟁 책동은 사실상 철저한 파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를 위해 상호 군비축소는 시급한 인류사적 과제입니다. 이미 인류는 1·2차 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열강들의 군비경쟁을 목격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동북아 관련 6개국이 지금까지 펼치고 있는 군비경쟁은 1·2차 대전 당시와 너무도 유사합니다. 게다가 무기 자체의 살상도와 파괴성이 당시와 비교할 바 못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훨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거울삼아 똑같은 실수가 재발되지 않도록 무언가 행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이러한 동북아 질서에서 과연 지금까지 ‘평화국가’ 내지는 ‘피해자’였을까요? 그래서 한국의 무장은 정당방위일까요? 한국 역시 긴장고조와 군비경쟁에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스톡홀롬 국제평화연구소(SIPRI)연감에 따르면 2000~2009년간 무기 수입액수 규모에 있어서도 한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액수의 무기를 들여왔습니다. 총 군비 지출액 상으로는 세계 12위이지만 군비증강의 속도 면에서는 세계 순위권이지요. 더군다나 매년 연례행사로 개최(?) 되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북한과 중국 등 다른 동북아 국가들에게 있어 위협적 몸짓이고, 근래에는 제주도에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등, 점차 군사력의 형태가 방어적 성격을 넘어서 공격적·전술적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군비증강은 이미 주변국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고 있고, 주변국들의 군비 증강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는 ‘치킨 게임’이 되고 있습니다.
병역거부가 던지는 화두는 단지 개인 인권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인류의 보편적·근본적 평화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에 대해 군대의 군사주의·안보제일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질서를 보더라도 재판관 여러분들께서 모호하게 인용한 ‘안보’논리는 평화와 공존에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공문구일 뿐입니다. 협애한 국가주의, 안보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현실, 완수하지 못하는 국제적 책임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적극적 군비축소의 노력과 비핵화, 합동군사훈련의 중단, 군대가 독점하고 있는 국민의무역을 다양한 사회복무제도 형태로 확대·전환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추구해야 할 대안입니다. 사실 이러한 과제에 있어, 병역거부권 인정과 최소한의 대체복무제도는 진작 이뤄졌어야할 최소 교두보였건만, “헌법”재판소는 그 평화적 과업에 끝까지 협조를 하지 않는 것 같네요. 이렇듯 헌법재판소가 변화된 시대 상황과 평화지향의 전제를 바탕으로 헌법을 풀이하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지 못한 채 경직된 모습만 보인다면, 이는 87년 시민항쟁으로 탄생한 헌재 본연의 취지와 의미를 폐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헌법을 끝까지 공문구의 무덤으로 가져가셔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생생한 현실에, 민중의 바다에 풀어놓으시길 바랍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여러분들, 이제는 당신들과의 이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 없는 법리 다툼에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이기 때문입니다. 병역거부권 인정 말고도 우리가 깨야 하는, 균열을 내야할 성역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당장 강정마을에 몰아친 해군기지의 망상을 막아내야지요. 병역거부권 쟁취도 다시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거리의 실천으로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60만 대군을 대폭 줄여나가는 일, “귀신 잡는 해병”마저 잡는 일제 관동군식의 군대문화·남성중심성 해체, 과도하게 긴 복무기간의 축소, 연례행사로 벌어지는 대규모 군사훈련 저지, 지역사회와 배제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회복무제도로의 현 징병제 전환 등 한국을 동북아 평화를 추동하는 선진적 평화사회로 만들기 위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여러분들이 이번 판결을 통해 보여준 낡은 관념과 영원히 ‘이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헌법재판소와 맺었던 길고 징한 인연만큼이나 길었던 이 편지도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감옥 안이라 손으로 ‘한 땀 한 땀’ 썼던 것이기에 지금 저의 손은 쥐가 나기 일보 직전입니다.(^^;)
판결과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병역거부자들의 행렬과 평화를, 더 많은 평화적 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많아질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법이 역사를 끄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법을 밀어나가는 것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2011년 9월 어느 날.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 중인 태준.
덧붙임
이태준 님은 2010년 11월 9일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2011년 2월 23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습니다. 현재 서울남부구치소(구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이고 이 편지는 ‘전쟁없는세상’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이태준 님의 주소는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164번 (153-60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