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6년 전 이주노동자 인권상담을 시작하면서 플라스틱 상자를 만드는 필리핀노동자의 어두침침한 공장을 방문했을 때, 한겨울 전기장판이 깔린 곳을 제외하면 방안에서도 얼음이 얼던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컨테이너 숙소를 방문했을 때, 나는 20년 전 잔업과 철야에 찌들어 누렇게 뜬 얼굴이 마치 봄날 낙동강 강둑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꽃 같다고 생각했던 신발공장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그토록 바꾸려고 몸부림쳤던 열악했던 노동현장과 비인간적인 삶들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만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처음 상담할 때는 임금을 체불하고도 "당신이 뭔데 나서냐", "불법체류자라고 봐주었더니, 당장 경찰에 신고해 집으로 보내 버리겠다"며 오히려 길길이 날뛰는 사장들이 이제는 레퍼토리를 바꾸어 "내가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아느냐, 빵도 사주고 양말도 사줬는데"라며 자신이 악덕업주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뀐 것을 보며 한국사회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은 책임을 져야 할 정부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1991년 이후 두 명의 대통령이 취임을 했고, 수많은 장관들이 교체되었지만, 늘 '사람'보다는 돈과 표를 쫓는 정치권에게 돈이 없어 정치자금도 낼 수 없고 투표권이 없어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이주노동자가 찬밥 신세임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7월 15일 정부는 불법체류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중소제조업과 서비스업 분야의 인력부족문제를 함께 해결한다며「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이란 것을 발표해서 이주노동자들과 시민단체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개선방안」의 주요 내용은 산업연수제도의 유지 확대, 서비스업 분야에 재외동포 취업허용, 2003년 3월까지 현재 체류중인 미등록이주노동자의 전원추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 인권유린의 원인이자 입국비리의 창구로 활용되어 온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고, 개선 안의 내용과 실시 시기를 두고 논의가 진행되어 오던 상황에서, 갑자기 산업연수제도를 유지 오히려 확대한다는 발표에서 "아, 또 선거구나"라고 깨닫는다.
이미 고학력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한국사회에는 현재 40만 명에 가까운 이주노동자들이 취업 중이며, 3D업종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서 외국인력의 고용확대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 산업연수제도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소수집단의 입장만을 대변하며 산업연수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와 노동시장구조를 보다 악화시키게 된다.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사회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는 경제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