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4일 남한·유엔군은 북한·중공군에 밀려 서울에서 퇴각했다. 이후 남한·유엔군이 3월 14일 서울에 다시 들어올 때까지, 서울을 둘러싼 남한·유엔군과 북한·중공군 간의 쟁탈전은 치열했다. 때를 같이 해 한반도 남쪽 곳곳의 야산에는 빨치산 활동이 계속되며 작은 전쟁이 이어졌다. 전남 나주 봉황면 철천리의 덕룡산도 그 중 한 곳. 밤에는 빨치산들이 마을을 통제하고 낮에는 군경이 지배하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주민 80여명이 '공비'로 몰려 경찰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시끄러웠죠. 전쟁통이라… 새벽에 (경찰들이) 호당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결하라고 해서, 안 나오면 죽여 버린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을 저쪽 논에 집결시켰죠. 이중 노약자들은 놔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기 '동박굴재'로 데려가 두 패로 갈라서 두 차례에 걸쳐 발포했어요."
철천리 입구에서 봉황 유족회 양성일 회장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당시를 증언했다. 때는 51년 2월 26일, 그 날 경찰에 학살된 사람은 70∼80명이었다. 양 회장의 아버지도 이때 희생됐다.
"무서워서 (근처에) 가질 못했어요. 사흘만에 집안 형님 두 분이 (학살터로) 아침 일찍 갔는데, 피로 난장판이 돼 버려서 (아버지 시신을) 찾지를 못했어요. 그렇게 하루 종일 걸려 석양에서야 옷을 보고 찾았죠. 그래서 야밤을 타 지게로 지고 마을로 왔어요." 양 회장은 당시 6살이었지만, 머리 한켠에 총구멍이 뚫린 채 죽어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당시 경찰들은 이들을 왜 죽였을까?' 문득 든 궁금증에 대해 양 회장은 "공비 색출 의미에서 그런 거죠"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그리고 "당시 안학봉이라는 빨치산 대장이 우리 동네 출신이었거든…"이라고 덧붙이곤,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양 회장은 무의식적으로 좌익에 대한 자기검열을 하고 있었다.
철천리는 행정구역상 3개의 구로 되어 있는데, 안학봉 씨는 철천3구 출신이다. 뒤늦게 확인된 사실이지만 철천3구는 당시 좌익활동이 꽤 활발했다고 한다. 철천1구와 2구에 살던 주민들 중 당시 학살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없었다. 결국 경찰들은 좌익 활동이 활발했던 철천3구를 표적으로 삼아 집단학살을 자행한 셈이었다.
하지만 학살된 영혼들은, 지난해 8월 봉황 유족회가 결성되기까지, 50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 없이 흐느껴야 했다. 봉황 유족회는 결성 직후 동박굴재 학살현장의 생존자인 김영태 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검증·기록하고, 같은 해 12월 동박굴재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국회에 청원했다. 이어 올 3월에는 유족들과 나주시민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봉황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애초 봉황 유족회는 동박굴재 학살 희생자로만 구성하려다, 인근 보도연맹 희생자와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를 모두 포함시켰다. 좌익 희생자와 우익 희생자들이 하나의 유족회를 결성한 것은 '빨갱이 콤플렉스'가 지배하던 시절을 살아온 유족들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양 회장은 "과거에는 서로 죽일 놈, 살릴 놈 했지만, 이 기회에 화합하는 의미로 같이 하게 됐지요"라며, "어차피 전쟁통에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 아니겠어요?"라고 함께 하는 취지를 밝혔다. 이에 따라 위령비에는 철천리 희생자 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희생자,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 명단까지 새겨져 있었다.
나주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은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51년 1월 20일 나주 세지면 동창교에서는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당시 5중대는 장성 고성산 갈재 작전 후 이곳에 들러 동창 마을과 섬말 주민들을 소집했다. 세지면에 빨치산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5중대는 주민들 중 군인가족과 경찰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90여 명을 그 자리에서 학살했다. 그 와중에 주위에서 농사준비를 하던 농민 40여명에게도 무단발포를 했다고 한다.
한편, 동창교 학살 직후에는 군경 합동으로 나주 다도면 소개작전이 벌어졌다. 군경은 빨치산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다 집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마을을 불질렀다. 이렇게 해서 죽은 수가 28명. 이 또한 공비 토벌이 명분이었다. 그 외 소규모로 죽임을 당한 예들이나 보도연맹 사건 또는 빨치산에 의한 학살사건도 나주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광주인권운동센터 최완욱 사무국장은 "사건에 대한 진실확인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역사적 진실의 회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라며 "(우리는) 그 짧은 시기에 왜 집단적 대학살이 일어났는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 사무국장은 또 "학살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학살행위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는 문제가 아니"라며 "진정한 명예회복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상관없이 그들이 마음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됐을 때 가능하다"라고 강조했다.
철천3구의 좌익활동에 대해 증언을 멈췄던 양 회장의 모습에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는 시끄러웠죠. 전쟁통이라…" 하지만 학살은 전쟁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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