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의 정체성과 신뢰성문제가 다시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다. 논쟁의 쌍방은 인권단체와 국가인권위. 지난 9월 17일 <시민의신문> 주최로 열린 ‘국민의정부 시민운동평가’ 토론회에서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의 발표 내용이 불을 당겼다.
오 국장은 토론회에서 △인권위 출범과정에서 발생한 인권단체 배제 문제 △빠른 속도로 관료화되는 모습 △진정사건 처리의 문제 △예산의 낭비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그러자 인권위원회는 “중상모략”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이에 오 국장이 ‘중상모략 발언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양상으로 공방이 진행됐다.
오 국장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지난해 인권위 설립과정부터 올 4월 30일 인권단체 토론회를 거치며 줄곧 지적되어 왔던 문제 외에도 △그 후 5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드러난 문제를 망라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표현이 거칠기는 하지만, 할 말을 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쟁점1> 인권위 출범과정에서 왜 인권단체들은 배제됐는가?
2001년 4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즈음, 인권위법 제정투쟁을 전개해온 ‘민간단체 공대위’ 내에는 두 개의 다른 흐름이 형성됐다. “불완전한 법안인 만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원칙론)과 “부족하나마 수용하고 법개정 등을 위해 노력하자”는 입장(현실론)이었다. 이러한 입장차이가 공개적 분열양상으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채 공대위는 해산되었다.
그런데 8월 1일 김창국 변호사가 인권위원장으로 내정된 이후, 원칙론적 입장에 서 있던 인사들이 오히려 ‘인권위 설립준비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른바 ‘참여와 배제’의 구도가 형성됐다. “논리대로라면 현실론적 입장에 있던 인사들이 인권위 설립작업을 주도하고 그 반대는 상당히 원칙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상황은 거꾸로였다”(오창익 국장)
당시 30여 개 인권단체들로 구성된 ‘연대회의’가 올바른 인권위 설립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으나, ‘참여파’들은 연대회의 그룹에 대해 철저한 보안을 지키면서까지 그들을 배제한 가운데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참여와 배제라는 잘못된 구도가 현재 인권위원회와 인권단체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 오 국장의 평가다. 오 국장은 “법 제정 이후 인권위원회가 세월을 허송한 데에는 위원장 내정까지 3개월을 그냥 보낸 대통령에게 1차적 책임이 있지만, 민간의 역량을 결집해도 어려웠을 작업을 ‘배제’하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움켜쥐었던 참여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권위측은 설립과정에서 빚어진 ‘인권단체 배제’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다. 지난 5월, 20개 인권단체들이 이 부분을 공개질의한 데 대해, 인권위는 “설립준비기획단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일축했으며, 오창익 국장의 ‘공격’에 대해서도 반론을 펴지 않고 있다.
인권위 설립과정에서 발생한 ‘참여파’의 ‘원죄(原罪)’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인권위에 대한 불신과 반목은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쟁점2> 직원채용 공정했는가?
오창익 국장은 “직원 선발이 비록 공채라는 형식을 거치기는 했지만, 참여파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내정되었다”며 “이러한 잘못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 국장은 “개인적 프라이버시 때문에 어떤 인사가 누구와의 인연 때문에 채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면서 “민간 출신 직원의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공채가 아닌 ‘알음알음’ 방식으로 채용됐고, 채용될 사람이 미리 내정된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주장했다.
직원채용의 공정성 문제는 이미 지난 5월 인권단체들의 공개질의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인권단체들은 “기획단 참여자와 자원봉사자에 대한 사전내정설 등이 제기되었으며, 1차 서류심사와 2차 면접에 있어 선발기준과 방식, 심사주체가 누구였는지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아, 국민들의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고 문제제기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서류심사 기준 등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인사들로 인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원자들을 엄정히 심사했다”고 답변했다.
<쟁점 3> 진정사건, 제대로 접수되고 처리되는가?
진정사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논점이 제기됐다. 우선 ‘진정건수’와 관련된 주장. 오 국장은 “월평균 259건의 진정이 접수되고 있지만, 실제 진정이라 할 수 있는 면전진정은 월 평균 54건에 불과하다”며 “이는 허원근 사건 이후 며칠 사이 40건 이상의 군의문사 사건을 접수했다는 한 인권단체의 경우와 대조적”이라고 꼬집었다. 오 국장은 “하루 평균 찾아오는 사람이 두세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권위는 크게 잘못 나가고 있다”며 “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지에 대해 인권위가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측은 “월평균 진정건수가 270여건, 그 가운데 방문진정 80여건, 면전진정 60여건으로 오 국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면전진정을 처리하기 위해 사무처의 전 직원이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반박했다.
진정과 관련된 또 하나의 쟁점은 “진정이 제대로 처리되는가”의 문제. 오 국장은 “인권위의 중요한 설립목적 중의 하나가 신속하고도 실효성 있는 구제활동”이라며 “지난 1월 진정을 제기한 구치소 사망사건의 경우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설명없이 사건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부분에 대해 인권위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쟁점 4> 빠른 속도의 관료화
인권위의 관료화 징후는 활동 초기부터 지적된 문제였다. 이와 관련, 오창익 국장은 최근 장애인이동권연대의 단식농성을 예로 들며 인권위를 비판했다. “인권위는 올해 8월 12일부터 인권위에서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인 장애인들에게 ‘공권력 투입’ 요청설을 계속 흘리면서 직원 휴게실로 옮길 것을 종용했고, 농성과정에서 단전조치, 출입통제 등을 통한 압박을 지속했다.”
장애인들의 점거농성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열린 전원위원회(8월 22일)에는 ‘장애인이동권연대 단식농성’에 대한 보고가 올라 왔다. 인권위 각층 출입구에 전자출입차단장치를 설치하고 장기적 보안대책을 수립하겠다는 계획이 신속하게 보고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출입차단장치는 현실화됐다.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실명화조치도 ‘관료화’의 대표적 사례로 이해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물론, 일부 언론에서조차 “인권위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보고싶은 것만 보려 한다”며 인권위원회의 권위주의적 대응과 관료화를 비판하고 나선 바 있다.
<쟁점 5> 고문변호사 제도와 예산 낭비
이번 논쟁에서 인권위측이 ‘마타도어, 중상모략’이라며 가장 발끈한 대목이다. 인권위원회는 출범 직후 고문변호사제도를 두고, 두 명의 변호사를 고문변호사로 위촉했다. 고문변호사의 자문은 위원장과 사무총장만 받게 되어 있고, 전화자문이든 면담이든, 매건 당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 왔다. 이와 관련 오 국장은 “2개월 동안 한 사람에게 1천만원이 넘는 자문료를 지급한 것은 예산 낭비이며, 그 인물이 ‘배제’와 ‘설립’을 주도했던 인사였다는 점에서 매우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인권위는 “변호사 개인이 아닌 로펌에 3개월 11일간 1천3백여 만원의 자문료를 지급했다”며 “건당 약 27만원에 달하는 자문료는 다른 전문가에 대한 지급수준에 비해 결코 과다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상의 논쟁과 관련해, 인권위원회는 “오창익 국장의 발제문에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이 상당수 담겨 있다”면서 “향후 적절한 시점에 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힐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창익 국장은 인권위에 대한 재반론 글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집행부 교체의 아픔을 딛고 거듭나, 여러 활약을 보이며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며 “인권위는 이대로 지지부진해도 좋은, 그렇고 그런 조직은 결코 아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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