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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집> '2003 겨울터널'을 지나는 사람들 ④- 부안대책위 자원활동가 이경미 씨

"부안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김종규가 오늘 임시군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이번에도 등원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등원을 거부하면 생활보호자들이 돈을 못 받게 될 거라고 김종규는 협박을 합니다. 하지만 그놈한테 주민들 회유하려고 뿌릴 돈은 있나 봅니다…."

부안 버스터미널 앞에 멈춰선 방송차량에서는 연신 김종규 부안군수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핵 반대를 상징하는 노란색 홍보물로 치장된 방송차 운전대에는 네 살 박이 아들을 옆에 태운 30대 아주머니가 타고 있었다. '핵폐기장 백지화·핵발전 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에서 홍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이경미 씨다.


낮에는 방송차에서, 밤에는 촛불집회로

부안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부안 토박이 경미 씨는 진서면에서 유기농 벼농사를 짓고 있다. "95년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유기농에 관심이 많았어요. 세탁기 안 쓰고 손빨래하고 기름보일러 대신 장작을 때는 생활이 그때부터 시작됐지요." 첫 아이를 낳고 환경을 생각해서 천 기저귀를 쓰려고 했는데 병원에서는 일회용을 고집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쓰레기를 만들게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철저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런 그녀에게 핵폐기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군수가 유치 신청 기자회견을 한 7월 11일, 경미 씨는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틀 전 대책위 대표와의 면담에서도 염려할 필요 없다던 군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맘대로 신청한 군수가 미워서 다들 일어섰지요. 핵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몰랐어요."

7월 26일부터는 부안수협 앞 광장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이대로 두면 핵폐기장이 들어설 참이니 너무 답답했어요. 주민들이 정확한 상황을 알려면 다같이 모여야 했지요. 모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시작할 때는 길어야 석 달이라고 생각했어요"라며 경미 씨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경미 씨는 부안수협 앞 반핵민주광장에서 촛불을 밝혀야 했다. 낮에는 방송차를 몰고 거리로 나섰다. 대학생들 몇 명과 이웃 아줌마들이 함께 했다. 저녁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반핵 깃발을 나눠주고 직접 만든 선전물을 뿌렸다. 남편이 공무원이라서 깃발을 내걸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아줌마, 남편이 경찰인데도 촛불집회에 나가겠다고 해서 부부싸움이 날 뻔한 집도 봤다. "읍내라면 안 가본 곳이 없는데 핵폐기장 찬성하는 주민은 딱 한 명밖에 못 봤어요."


경찰폭력에 아이들까지 상처

8월 23일 전주 집회에서 경미 씨는 전경이 내리친 방패에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빨 5개가 부러져 나갔고 허리에는 군화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아줌마라고 해서 봐주지 않더군요.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그 20대 청년들 가슴에도 평생 상처로 남겠지요." 경미 씨의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이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 동요를 부르면서 놀 나이에 반핵출정가를 부르고 저녁때 전경들이 나타나면 옆에 가서 욕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 사이에 제일 심한 욕이 예전에는 '김종규보다 나쁜 놈'이었는데 지금은 '노무현같은 놈'이에요. 아이들도 공이 노무현에게 넘어갔다는 걸 아나 봐요."

경미 씨가 겪은 고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농민회 간부였다가 대책위에서 교육을 맡고 있는 남편에게 지난달 수배가 떨어졌다. 경미 씨는 부안성당에 갇혀 지내게 된 남편 몫까지 해야 했다. 매일 촛불집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1시. 장작불까지 꺼져 차가운 방바닥에 아이들을 눕혀야 했고, 아침이 되면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방송차에 태우고 또 돌아다녀야 했다. 여섯 살 박이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도 그만 다니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위독한데도 막내아들인 남편은 찾아갈 수도 없게 됐다.

"핵만 아니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천 번도 넘게 들었어요."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이웃들이 아이 옷과 장작도 챙겨주고 김장까지 대신 해줘 큰 힘이 됐다. 일년 농사를 건너뛰었다고 쌀을 가져다 준 이웃들도 있었다. "예전에도 친한 이웃지간이었지만, 이제는 더 가까워졌어요."


"돈 먹여 찬성자 모으고 다녀요"

지난 10일 산업자원부의 발표에 대해 경미 씨는 속임수라 잘라 말한다. 산업자원부가 "주민투표를 거쳐 다른 지역에서도 새로 유치신청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여러 언론에서는 "사실상 백지화"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미장원에서 아줌마들 상대로 그릇 선물하는 사람들, 찬성 서명만 하면 1인당 3만원 준다는 사람들이 돌아다녀요." 군수측이 조직하고 있는 이른바 '핵폐기장 유치단'에 이름만 달면 매달 60만원을 준다는 소문도 돈다. 공공근로하는 영세민들에게는 "촛불시위 나가지 말고, 노란 옷 입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누가 돈을 먹었는지 이웃들끼리는 다 알지요. 없는 것도 서러운데 이웃들한테 눈총까지 받게 하다니 얼마나 비열해요?"

게다가 정부는 다른 지역 유치 신청도 받겠다는 입장이다. "다른 곳으로 가면 똑같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 에너지 정책이 바뀌어야 하는 건데, 부안 주민들 힘만으로는 안되지요."


"내년엔 가족과 바다를 보고 싶어요"

부안대책위는 지금 위도가 바라보이는 격포에서 올해 마지막날 '핵넘이 축제'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부안군이 해마다 열었던 '해넘이 축제'를 지역분위기 핑계로 열지 않자, 주민들이 이름을 바꿔 개최에 나선 것. 그날 이들은 저무는 2003년을 바라보며 핵 없는 2004년을 기대하는 촛불을 들 참이다. 경미 씨도 그 자리에 설 것이다. "내년에는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