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님. 부안성당 안에 마련된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 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아래 부안대책위)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왜 이제야 왔냐?”는 뼈있는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맞습니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 너무 ‘늦게’ 도착한 것입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는 지난 10월 3일부터 1박 2일로 부안대책위가 주최한 반핵 현장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부안투쟁이 언론에 의해 왜곡되고 ‘지역이기주의’로 몰리는 등 반핵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의 사회단체가 참여해 부안군민들의 일손을 더는 ‘국민농활’로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 애초 ‘기획의도’였습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농번기가 아니어서 일거리를 배당 받지는 못하고, 대신 촛불집회 무대 설치 등 집회 지원을 맡기로 했습니다.
집회 시작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 있어서 혼자 무작정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인권하루소식 취재를 빙자했지만 실은 그동안 부안투쟁을 보면서 가지고 있었던 질문―‘자기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언론과 요지부동인 정부를 상대로 군민들이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을 풀고 싶었습니다.
부안대책위 이현민 정책실장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부안의 힘’입니다”하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는 “인구 7만의 부안에서 최소 3천 명이 매일 촛불집회에 모여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지난 두 달을 돌아봤습니다. 여름 한 철 장사로 1년을 먹고사는 해수욕장 주변 주민들도 여름 내내 핵폐기장 싸움 때문에 생업을 돌보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러면서도 1년은 버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정책실장은 87년 항쟁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이후 스스로를 존재하게 한 동력이었다고 털어놓으면서, 일생에 그런 경험 한번 하기가 정말 힘든데 자기는 지금 두 번째라며 뿌듯해 했습니다. “변혁의 시기는 일상의 시기 100년과 맞먹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대책위 간부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먼저 부안군청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부안성당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부안군청은 컨테이너 박스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경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군청 앞 3거리 주위 상가에는 10군데 중 9군데 꼴로 온통 “핵폐기장 반대”라고 써진 노란 깃발이 버젓이 꽂혀 있고 상점 진열장 안쪽으로 “핵은 죽음입니다”라는 선전 깃발도 붙어 있습니다. 병원, 약국, 전자 대리점, 식당, 노래방, 포장마차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모두 노란색입니다. 가끔씩 보이는 택시와 버스, 자가용에도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이들 깃발은 어떤 데모대보다도 더 강력하게 부안군청을 위협하고 있어 지키고 있는 전경들이 더 위태로워 보입니다.
군청 앞 주택가 골목에서 40대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이 분은 아들이 부안중학교 2학년인데 40일 째 등교거부 중이고 매일 촛불집회에도 나간답니다. 이 분은 “정부 얘기대로 핵폐기장이 안전하다면 서울로 옮기면 되겠네. 강남 부동산 투기 문제가 심각하다던데 강남으로 옮기면 땅값도 떨어지고 좋겠네”하고 쏘아붙입니다. 등교거부 때문에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겠냐고 묻자, “그래봤자 유급밖에 더 당하겠수”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40대 아저씨는 “잘하라고 뽑아놨는데 군수 놈이 순식간에 말을 바꿨지, 그 놈 가만두면 안 돼”라며 흥분했습니다. 촛불집회장 근처 노점에서 옷을 파는 한 아주머니도 “모든 게 군수의 독단적 결정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부안에서 핵폐기장 찬성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 분위기”라면서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안전하다고 하니 나는 핵폐기장 찬성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안에서 제가 만난 사람 중에 핵폐기장 찬성한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는 택시 몇 대가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택시 뒷좌석에 타고 신문기자라고 소개하면서 인터뷰 요청을 하니 경계의 눈빛부터 보냅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다지만 부안주민들을 폭도로 모는데는 언론이 한 몫을 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뉴스는 90%가 거짓말이야, 중앙언론은 신빙성이 없고 지방지는 모두 매수됐어”, “우리가 수백 명 다친 것은 보도 안 하더니 군수 다친 것은 자세히도 보도하더라”, “99.9%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지금은 촛불만 들고 있지만, 추수가 끝날 때까지도 해결 안되면 다들 곡괭이를 들거야” 인권하루소식과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읍내 최대 시장인 부안상설시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여느 시골시장과 다를 바 없는 시장 입구에는 시장 번영회 명의로 플래카드가 붙어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부안상설시장 똘똘 뭉쳤다 핵폐기장 어림없다”, “부안 땅 팔아먹은 김종규는 각오하라” 생선 좌판 옆에도 “핵폐기장 반대” 깃발이 어김없이 꽂혀 있습니다. 간간히 촛불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부안대책위 방송차가 골목을 누빕니다.
촛불집회장에는 무대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고, 사랑방 식구들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특히 많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습니다. 한국이용사회 부안군지부, 부안초등 56회 동창회 등등 명의는 다양했지만 목소리는 하나였습니다. “정부는 부안군민의 소리를 들으라”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대안에너지 센터의 이상훈 사무국장이 군민 반핵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안면도 면민은 노태우 군사정권과 싸워서도 이겼고 굴업도에서는 덕천면민들이 김영삼 문민독재와 싸워 이겼는데 부안은 군민들이 나서 승리가 눈앞에 와있다”며 “이제 남은 문제는 참여정부가 얼마나 체면을 잘 차리면서 마무리하는가만 남았다”고 군민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는 또 “단순히 핵 반대만 하면 부안 말고 어디에서든 똑 같은 일이 또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대안을 말해야 한다”, “유럽연합처럼 태양열, 풍력, 지열, 동식물 연료 등 재생가능한 에너지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70일 째 촛불집회가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습니다. 친구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부안여고 3학년 학생은 왜 촛불을 들고 있는지 물어보자 “우리가 어른들보다는 많이 모르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요. 군수의 독단은 민주주의가 아니에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도 삼보일배를 하고 있는데 수능이 코앞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집회는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일 있었던 국무총리와 부안대책위 대표들간의 면담결과에 대해 부안대책위 김인경 공동대표는 △부안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대화기구를 구성하고 △조건 없이 모든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 대표는 또 “우리는 정부가 후퇴하기 위한 명분 찾기에 들어갔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이번 대화는 핵폐기장을 폐기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만약 정부측이 시간 끌기나 물타기를 시도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집회에 참가한 군민들은 만세삼창을 하면서 기쁨을 서로 나눴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상임활동가는 연대사를 통해 “경찰은 여러분을 폭도라고 하지만 저는 인권의 관점에서 여러분들의 행동이 얼마나 옳은지 말하고 싶어 올라왔다”고 말을 꺼내면서 부안군민의 투쟁은 “국가의 부당한 권한 행사에 맞서는 민중들의 저항권 행사”라고 격려해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부안성당으로 돌아오면서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매일 저녁 집회 장소로 모이는 이유에는 부안군수의 독단적인 행태에 대한 분노도 물론 있겠지만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 후 부안대책위 사무실에서 열린 뒷풀이 자리에서 대책위 교육담당 김종섭 씨가 제 갈증을 채워줬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영광으로 견학 갔다가 폐가로 가득 찬 동네를 보면서 경악한 점 △투쟁 초기부터 면 단위로 핵반대 교육과 핵교육지도자 양성과정이 열렸던 점 △기존 농민회와 선주들의 모임인 어촌계가 기초가 돼 면 단위 대책위가 만들어진 점 등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번 투쟁은 지도부와 기층 민중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모범답안을 주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또 참여를 보장하는 집회문화, 주민들의 자발성, 투쟁수위를 알아서 조절하는 능력, 다양한 투쟁 방법 등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난타 시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평화적인 촛불집회에 대해 경찰이 폭력을 쓰면서 시비를 걸어오자 주민들은 돌맹이 등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뭐든 들었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걸 경찰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바닥을 치기 시작했는데 집회 참가하지 않은 주민들까지 가세해서 ‘난타’ 하는 바람에 기가 질린 경찰들이 결국 물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군수 폭행 사건 이후 주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극에 달했는데도 오히려 군수의 학교 동기들이 모인 친목계에서 군수를 계원에서 제명하고 대책위로 성금을 보내올 정도로 군민들의 참여 의지가 높았다는 설명입니다.
뒷풀이 자리에서 만난 위도지킴이 백준범 사무국장은 “위도에 한 번 와보면 왜 이곳에 핵폐기장을 만들면 안 되는지 알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말 나온 김에 백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다음 날 위도로 떠났습니다. 격포에서 위도까지는 5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핵폐기장에 대한 위도와 부안의 여론은 예상했던 대로 정반대였습니다.
그물을 손질하던 한 위도 주민은 “우리는 90% 넘게 찬성한다. 영광은 핵발전소로, 부안은 새만금 때문에 보상을 받았는데 우리만 못 받는다는게 말이 되나?”하고 화를 냈습니다. 부안군민들이 위도 주민들을 ‘돈 벌려고 고향 팔아먹는 매향노’라고 부른다는 것에 속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20년 고기를 잡았다는 멸치잡이 배 선장은 “예전에는 근처에서 조기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먼바다로 나가도 멸치밖에 안 잡힌다”며 “먼 바다에서 조업을 허용 받으려면 배가 90톤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위도 어민들 대부분이 2~3억씩 대출을 받은 상태”라고 털어놨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주민의 경우 “카지노나 바다목장, 골프장이 무슨 필요가 있나? 되도록 빨리 약속한 대로 현금 보상이 되면 좋겠다”며 “현금보상 없으면 누가 찬성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위도 도장이 찍혀 있는 고기는 격포 쪽에서는 사지 않을 정도로 양측의 반감이 너무 깊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위도에 이제는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상경하는 길에 잠시 들린 부안성당에는 “이 땅 어디에도 핵은 안 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핵폐기장이 부안 주민들에게는 “내 땅에는 안 된다”를 넘어 핵발전소 폐쇄, 대체에너지 도입 필요성 등 의식의 확장을 가져다줬는데 위도 주민들에게는 빚더미로부터의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위도에 가보기 전까지는 핵폐기장 반대에 익숙하게 동의하고 있었는데, 빚 때문에 보상금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핵폐기장 유치에 찬성하고 결국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 위도 주민들 앞에서 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책사업이 지연돼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위도 주민은 보상금을 받고 나면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자 “빚 갚고 난 다음에 또 다른 섬으로 가서 고기 잡아야지, 그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라고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생존권이 인권의 기본이고 다른 권리의 전제조건이라면, 부안주민과 위도주민 모두에게 인권은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개발사업이 지역주민들 삶의 조건을 회복시키고 자연과도 어울릴 수 있어야 할텐데 아직 우리에게는 “이런 개발이 어떻게 가능한지?” 직접 볼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하나의 질문을 안고 갔다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또 다른 질문을 품고 돌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또 다른 곳에서 똑같은 형태로 변주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