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호주제와 관련된 민법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 지난 수십 년간 이어왔던 호주제 폐지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됐다.
3일 헌재 전원재판부(주심 김영일 재판관)는 "호주제는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로서, 호주승계 순위, 혼인 시 신분관계 형성, 자녀의 신분관계 형성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이고, 이로 인하여 많은 가족들이 현실생활과 가족의 복리에 맞는 법률적 가족관계를 형성하지 못하여 여러모로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다"며 호주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민법 조항들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36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선고했다.
호주제는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
헌재는 현행 호주제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와 누나들을 제치고 아들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제치고 유아인 손자가 호주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남성우월적 호주승계 서열을 가지고 있고 △혼인관계에서 아내는 대등한 당사자임에도 아내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편입되는 신분관계를 형성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수동적·종속적 관계를 정착시키며 △이혼한 아내가 자녀의 친권자이자 양육자로서 자녀와 함께 살더라도 자녀들의 호주는 전남편이 될 수밖에 없어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취급받는 불편과 고통을 겪도록 하는 등 "개인을 가족 내에서 존엄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다만 헌재는 호주제에 대해 단순위헌 결정을 내리면 "호주를 기준으로 가별로 편제토록 되어 있는 현행 호적법이 그대로 시행되기 어려워 신분관계를 공시·증명하는 공적 기록에 중대한 공백이 발생"한다며 "호주제를 전제하지 않는 새로운 호적체계로 호적법을 개정할 때까지 심판대상조항들을 잠정적으로 계속 적용"하기 위해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했다.
이번 결정은 개인에게 가족을 구성하고 선택할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와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인정, 가족 내 평등한 관계 유지에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이구경숙 정책부장은 먼저 "호주제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분들의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졌을 것 같아 기쁘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국가공동체가 실현해야 할 근본가치로 천명된 자유, 평등, 민주주의가 가족생활 내에서도 역시 추구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예외가 없음을 보여주었다"고 이번 판결의 의의를 설명하며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헌재가 "입법자는 조속히 호적법을 개정하여 위헌인 호주제의 잠정적인 지속을 최소화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해 호주제 폐지 이후 새로운 신분등록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사생활침해와 소수자 차별 없는 새로운 신분등록제
현재 국가신분등록제인 호적제를 규정하고 있는 호적법은 호주제 폐지와 함께 새로운 신분등록제로 대체될 전망이다. 신분등록제도는 한 나라의 국민이 필요한 신분사항을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개인의 정보를 국가에 등록하는 것. 현재 대법원은 '혼합형 1인1적 편제방식'을, 법무부는 '가족별 편제방식'을, 인권단체들은 '목적별 편제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과 법무부 안은 사생활 침해와 소수자 차별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활동가 타리 씨는 법무부와 대법원의 안에 대해 "신분등록원부에 신분사항, 혼인사항, 가족사항, 입양에 관련된 내용이 다 들어가 있어 호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현행 호주제의 폐해를 해결하지 못하는 안"이라고 지적했다. 또 "신분등록부의 기본틀이 본인, 배우자, 부모, 자녀로 되어 있어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되는 '정상가족' 외 다른 형태의 가족은 이른바 '결손가족'이라는 편견을 조장한다"며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자는 안"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전체 혈연가구 중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되는 '정상가구'는 57.8%에 머무를 뿐이다.
이에 대해 '목적별신분등록제실현연대'는 신분등록제도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인권침해 요소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목적별 편제방식'을 내놓은 바 있다. 이 방안은 한 개인의 신분과 관련된 사항을 목적에 따라 분류하여 개인의 신분에 등록된 사항을 기록하는 '신분등록부'와 혼인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하는 '혼인등록부' 등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신분변동내용이 있으면 신분등록부에는 변동된 최신의 내용만 기록하고 이전 사항은 부기번호로 연결된 '신분변동부'로 이전된다. 혼인등록부도 마찬가지로 변동된 내용만을 기록하고 이전 사항은 '혼인변동부'로 이전된다.
한편 오는 21일 국회 법사위 공청회에서는 호주제 폐지 이후 새로운 신분등록제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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