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예전처럼 단순히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법의 지배'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대법원의 판결 하나하나는 국가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국민 생활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규정한다.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사법부의 위상을 우리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직적 위계를 갖는 법원 조직의 최상부에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으로 이루어지는 대법원이 위치한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은 13명의 대법관 임명 제청권, 헌법재판소 판사 3명에 대한 추천권을 비롯하여 법관 임명권을 모두 갖는다. 사법 권력 구성의 법적 권한이 대법원장에 집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각종 주요 기구에 사법부를 대표하여 위원들을 추천할 수 있다. 권력 3부 중 사법부의 대표로서 행사하는 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국가 권력 구성의 한 주체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처럼 실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법원장이 어떤 자질과 성향을 갖춘 인물이냐는 마침 물꼬가 트인 사법개혁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침 올 9월로 현 대법원장이 임기를 마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새 대법관을 조만간 지명할 것이라고 한다. 새로 선출되는 대법원장은 내년 초까지 6명의 대법관을 임명 제청하게 되어 있어 대법원의 보수 성향을 개혁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국가적, 민족적으로 중차대한 사안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가 대법원장의 선임 기준을 발표하는 등 후임 대법원장 선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과거의 사법부는 독재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적극적으로 해냈다. 조봉암 선생 사건이나 인혁당과 같은 '사법살인' 판결, 최근 함주명 씨의 재심 무죄 확정 판결에서 보듯이 고문과 조작으로 얼룩졌던 조작간첩사건에 대한 가혹한 판결, 엉터리 문서감정서 하나만으로 '살인방조죄'를 확정했던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과 시국공안사건에서 정보기관이 요구하는 대로 '쪽지 재판'을 내렸던 굴욕의 과거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득세한 정치판사들이 오늘의 대법원을 구성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행정, 입법부는 그런대로 개혁의 과정을 밟아왔으나, 사법부는 개혁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민주화의 과실만 취하여 정치적 독립은 이루었으나, 선출되지도, 통제되지 않는 권부로 남아 있다. 이런 대법원은 무소불위, 시대착오적, 안하무인격의 판결을 쏟아낸다. 유엔 인권기구에서 반인권성이 수차례에 걸쳐 지적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훈계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 측의 수십 억 원 손해배상청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판결로 일관한다. 정보공개를 하지 않는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인터넷에 정치인 비판 글을 쓰는 것도 위법하다고 판결한다. 반면에 재벌과 비리 정치인에게는 지극히 관대한 판결을 유지해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 불평등 구조의 심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법원은 단 한 차례도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권원칙으로 인정되는 국제인권조약을 판결에서 인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급심의 진일보한 판결마저도 뒤집어 후퇴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선임될 대법원장이 법원의 개혁,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명할 새 대법원장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인사여야 한다. 먼저 사법부의 오욕의 과거를 청산할 의지를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분단과 수구냉전적 가치관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고, 지금껏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 진전을 가로막아온 국가보안법이 인권원칙에 반한다고 분명히 판결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경제권력을 제한하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차별 현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권을 사법적 판단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가치로 뿌리 내릴 수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 원리와 철학에 충실하여 사법 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파괴하고, 법원의 개혁과 운영을 선도하고, 국민의 사법참여를 위한 제도를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인권조약과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진취적으로 해석하여 인권의 확장을 꾀할 수 있는 인권의식이 충만한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대법원이, 아니 사법부가 국민들로부터 불신과 지탄을 받는 처지에서 벗어나 진정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적임자를 노무현 대통령은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 아직은 민중들이 대법원장을 선출할 수 없고, 사법부를 통제할 방도도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새 대법원장은 국민참여의 사법부로 거듭나도록 노력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사법개혁의 기회는 개혁적인 새 대법원장의 지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정녕 인권의 가치를 우선하는 대법원장을 원한다.
- 2864호
- 법원·검찰,논평
- 인권운동사랑방
- 2005-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