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을 통해 인권활동가들을 옥죄는 손해배상·가압류, 명예훼손 고소·고발 등은 일단 논외로 하자. 형사처벌로서의 벌금형만 이야기하기에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형사처벌을 통한 인권옹호활동의 탄압은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탄압이라는 점에서 민사소송을 통한 탄압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벌금형보다 가혹한 형벌인 징역형도 논외로 하자. 최근 들어 징역형과 같은 고전적인 탄압수단보다 ‘가벼우면서도 세련된’ 벌금형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더기, 무작위 벌금형의 현황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투쟁에서 많은 인권활동가들은 굴삭기와 레미콘에 올라가거나 대추분교 건물을 지켜서는 등 진지한 불복종행동을 펼쳐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향은 2007년 말부터 사법부의 벌금형으로 응축되어 나오고 있다. 2006년 5월 4,5일 대추분교 철거와 관련해 진행된 재판(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제1형사부 2007고합17)에서 검찰이 피고인 119명에 구형한 벌금은 모두 2억 1950만 원, 평택 관련 투쟁에서 쏟아진 벌금 총액은 검찰 구형 기준으로 4억을 훌쩍 넘는다.
평택에서만 ‘벌금지뢰’를 밟은 것이 아니다. 2007년 7월 17일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공지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었던 기자회견은 사법부에 의해 간단하게 ‘집회’로 간주되었고 14명의 참가자들에게 모두 1600만 원의 벌금형이 떨어졌다. ‘비정규직 보호법’의 허울을 온몸으로 폭로하며 뜨거운 여름 더욱 뜨겁게 투쟁했던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에게 공동주거침입죄, 업무방해죄 등의 명목으로 부과되고 있는 벌금액수도 어마어마하다.
이와 같은 벌금형은 무더기로 쏟아질 뿐만 아니라 무작위로 떨어지고 있기도 하다. 평택 관련 재판에서 한 피고인은 2006년 5월 5일 대추리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행되었다. 오후 나절 평화공원에 있었던 피고인에게 검찰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자른 뒤 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난입하여 돌을 던지고…”라며 벌금을 구형했다. 오랜 재판 끝에 재판부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며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검찰이 항소한 상태다. 당시 피고인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연행된 사람들은 모두 기소유예통지를 받았다. 피고인이 달랐던 점은 평택 관련 투쟁으로 이미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점밖에 없었다. 벌금형이 사법적 판단 이전의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인 벌금형, 현실적인 고민
벌금형은 일반적으로 구금형보다 경한 죄에 부과되는 형벌이다. 인신의 자유에 대한 구속 요건을 엄밀히 하려는 노력의 ‘결실’ 중 하나다. 그러나 벌금형의 소득역진적 성격은 흔히 지적되는 한계다. 재산이 많고 소득이 안정적인 사람과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에게 죄의 경중과 무관하게 형의 경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성이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무더기, 무작위 벌금형의 본질이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벌금형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거나 제한되는 기본적 인권의 범위와 강도는 달라진다. 1~2백만 원이 구형되는 것 자체가 주는 심리적 압박도 적지 않으며 재판을 위해 쏟아 붓는 시간과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또한 불복종행동의 결행 이후 한참 지난 시점의 선고는 형에 대한 공동대응을 어렵게 하고 어느 순간 활동을 위축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인권활동가들은 대개 약식명령으로 청구되는 벌금형에 항의하기 위해 정식재판을 청구한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 역시 경제적 부담이라 홀로 재판정에 서게 되는 인권활동가들은 재판의 절차나 내용을 세세히 알지 못해 초반부터 위축되기 일쑤다. 게다가 '개전(改悛)의 정(情)'을 인정받기 위해 공소사실을 인정해야 할지, 벌금을 감수하고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으므로 뉘우침 없다는 솔직함으로 항변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대개의 인권활동가들이 생계비에 못 미치는 활동비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야말로 ‘현실적인’ 고민인 것이다.
오로지 국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승인된다면
그러나 인권옹호활동에 쏟아지는 벌금형의 문제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부과되는 벌금의 죄목 중 대표적인 공무집행방해죄를 살펴보자. 형법 제136조 제1항은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조항이 보호하는 것은 ‘공무’다. 경찰관이 일단 연행을 시작하면 그것에 항의하거나 몸부림치는 등의 모든 행위가 ‘폭행 또는 협박’이 된다. 경찰관의 연행이 ‘공무’라는 이유 말고는 아무 이유도 없다. 현행법의 테두리에만 있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모든 사무는 ‘공무’로 인정된다.
평택 미군기지를 확장하기 위해 국방부가 일단 굴삭기를 밀고 들어오면, 위력을 행사하기 위해 농수로를 차단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모든 행위는 공무집행방해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로지 국가의 이름으로 승인받는 ‘공무’가 인권을 침해할 때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침해사안이 있을 때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벌인다. 언론을 통해 입장을 알리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선전전을 하기도 한다. 정부 부처나 관련 기관에 질의서와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하며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로 사회적 공론의 장이 형성되지 않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일사천리로 사안이 추진될 때 인권옹호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불복종행동밖에 없다.
"저항하시라, 벌금 낼 능력이 있거든"
인권은 법이나 국가권력에 앞서는 가치다.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은 현행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불가피하게 넘어서게 된다. 이와 같은 불복종행동이 있어 ‘악법’들이 조금씩이나마 개선되어오기도 했으며 인권실현을 위한 조치들이 마련되어오기도 했다. 강제퇴거에 맞서 싸운 철거민들이 있었기에 세입자대책이 그나마 모양새를 갖추었고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버스에 쇠사슬로 몸을 감는 장애인들이 있어서 장애인 인권 현실이 조금씩 나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인권옹호를 위한 불복종행동을 통해 성찰하기는커녕 ‘인권’을 아무 의미 없는 단어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재판정에서 죄를 논하는 동안 ‘인권’은 얘기되지 않는다. 공무집행방해보다 흔한 죄목인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대놓고 부정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 없다. 권력의 사법화 흐름은 인권옹호를 위한 불복종행동을 유죄/무죄를 다투는 일개 사건으로 취급한다. 민주적 합의의 장이 법에 의해 오히려 봉쇄되고 있다.
한편, 민중언론 <참세상>은 고지서 한 장으로 과태료 1000만 원을 내야 할 ’의무‘를 부과 받았다. 민중언론 <참세상>의 죄라고는 인터넷 실명제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했던 것, 실명제의 폭력이 도사린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들이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려고 기술적인 노력을 다한 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실명확인제 의무규정을 이행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날아온 ’과태료처분통지‘가 보장하는 항변의 기회는 이행/불이행을 다투는 이의신청까지다. 인터넷실명제가 침해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나 정보인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애초 배제된다.
두려운 것은 유죄가 아니라 ‘무죄’
무더기 벌금이 노리는 것은 개별 피고인에 대한 처벌이나 ‘범죄’ 예방이 아니다. 권력이 ‘예방’하려는 것은 인권옹호활동 그 자체이며 인권옹호활동 일반에 대한 탄압과 광범위한 통제가 그들의 목적이다. 국가권력이 인권의 가치를 재판정 안에 가두려고 할 때 인권활동가들은 재판정 밖에서 인권이 계속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 사법부가 유죄를 선고할수록 허물어지고 훼손되는 것은 사법권력일 뿐이며 인권옹호활동에 대한 심판은 인권의 기준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사법부의 무죄판결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개전의 정’을 이끌어낼 불복종행동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벌금형에 대한 공동대응이 시작되어야 한다.
불복종행동은 사회정책이나 방향에 영향을 미쳐 인권 실현에 기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획되기도 한다. 위법에 따른 부담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바탕으로 하며 벌금은 불복종저항에서 감수하려고 했던 바의 실체 중 하나다. 현실의 법이 유죄를 선고할 것을 두려워했다면 불복종행동은 없었을 것이다. 불복종행동을 위한 기금을 미리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며 벌금을 못 내면 집단으로 노역을 살 수도 있다. 인권옹호활동에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벌금을 마냥 갖다 바칠 수는 없지만 사법부의 판결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를 마냥 기대하고 있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벌금형을 불복종행동에 나선 개개인에 대한 심판으로 남겨두지 않고 벌금형까지 ‘계산’하는 공동의 불복종행동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기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벌금 그 자체가 아니다. 인권옹호활동에 대한 무더기 벌금형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증거라는 것, 그러나 벌금형이 개개인의 몫으로 돌아가면서 시나브로 불복종행동을 우리부터 ‘법적으로’ 점검하게 될 것이라는 위험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경한 죄’를 다루는 벌금형에 인권을 위한 저항이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인권옹호를 위한 불복종행동은 ‘경한 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중한 ‘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