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투자 한국기업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권 탄압에 공동대응하자는 움직임이 국내에서 일고 있다. 12일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단병호 의원(민주노동당)은 '동남아진출 한국기업 노동권 탄압 실태조사 보고와 대응전략 워크샵'을 공동으로 열었다.
실태조사는 지난 6월 30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한국계 초국적기업 노동권탄압과 대응 전략' 워크샵을 통해 이뤄졌다. 조사팀은 △캄보디아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에서 온 활동가들과 심층인터뷰도 진행했다. 발표내용에는 각국 주재 한국대사관이 파악해 노동부가 취합한 '해외진출기업 분규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도 포함됐다.
노사분쟁 89.7% 아시아에 집중
2004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통계에 따르면 해외진출 한국기업 6275개 가운데 중국이 2783개(44.4%)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로 1579개(25.5%)에 달했다. 노동부 제출자료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올해 7월까지 발생한 노사분쟁은 모두 88건으로 베트남(44건), 인도네시아(23건) 등 아시아 지역(89.7%)에 집중됐다. 분쟁발생 사유로는 △근로기준법 위반(41건) △임금인상요구(19건) △구조조정(6건) 등으로 나타났다.
탄압 사례로는 한국에서도 '무노조'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삼성이 두드러졌다. 말레이시아 삼성전자는 1999년 노조설립신고서가 제출되자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조탈퇴 서명을 받았으며 노조설립은 끝내 무산됐다. 말리이시아 전기산업노조 관계자는 "노조설립을 하자마자 사측의 한국 관리자들은 삼성에서 노조는 있을 수 없다며 탈퇴서명을 강요했고, 언어폭력, 협박, 해고위협을 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탈퇴서에 서명했으며 이후 동력이 소진되었다"고 밝혔다.
올해 5월 태국 삼성 일렉트로-메카닉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측은 노동자들을 하청업체로 전출시키면서 경력인정 없이 신규사원으로 재계약하고 수당·복지 등이 저하되는 조건을 제시해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 과정에서 사측은 노동자 7명을 △노동환경 저해 △사측에 손실 입힘 △노동자 선동 등을 이유로 해고했다. 태국의 한 노조 활동가는 "한 한국 관리자는 '삼성에서 노조는 안 된다. 이것이 삼성의 방침이다'라며 노조설립을 차단했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했다"고 전했다.
사업주 위장폐업·잠적에 노동자는 속수무책
문제가 발생하면 사업주가 잠적해버리거나 귀국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분석도 나왔다. 노동부 제출자료에 따르면 과테말라의 C-TEX는 지난해 6월 사업주가 잠적해 회사가 도산했고 노동자 1200명에 대한 임금 30만불, 퇴직금 40만불이 체불된 것으로 추산됐다. 인도네시아의 신발업체 태화는 부채상환이 어려워지자 지난 2월 사업주가 제3국으로 도피했고, 노동자 3700명의 퇴직금 330만불과 함께 100여개 하청업체 원부자재 구매대금 450만불이 체불됐다.
단 의원실의 박명혜 보좌관은 "규모가 작은 사업장은…체불 후 부도와 도주를 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대부분은 회사로부터 지급을 받지 못한 채 무방비로 있거나, 자국 내 보호장치가 없어 해결이 묘연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밝혔다. 또 "노동조합 설립을 하면 폐업한 후 다른 이름으로 공장을 여는 위장폐업 사례는 심심지 않게 발생하고 있어…한국기업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적 의식을 드러내 주기도 하였다"고 소개했다.
실태조차 모르는 한국정부
상황이 심각한데도 한국정부는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제출된 노동부 자료도 이미 집계된 자료가 아니라 단 의원으로부터 요구를 받은 노동부가 현지 대사관으로부터 자료를 모아 새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박 보좌관은 "자료가 일부 국가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이미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사례도 포함되지 않았다"며 "한국정부는 해외로 진출하려는 기업에는 온갖 정보와 지원을 제공하면서 해외투자를 활성화시키려하지만 부당노동행위와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대책은커녕 최소한의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최재훈 국제민주연대 활동가는 "현지인의 이름을 빌려 회사를 만드는 경우나 100인 이하 영세사업장은 집계에서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아 노동탄압 건수는 더 많을 것이고 그 양상도 더 극단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보좌관은 "노동부는 해외진출기업의 특성 상 노사분쟁 시 보고의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권고사항이기에 정보를 얻기조차 힘들고, 보고를 강제하기란 더욱 어렵다고 한다"며 현재 일본·제네바·중국 등8개국에 각 1명씩 있는 노동부 해외 파견 노무관의 적극적인 역할수행을 주문했다. 노무관 업무처리규정에 따르면 노무관은 진출업체에서 △노사분규 △짐단적 갈등 △중대재해 등 이른바 '중대사고'가 발생하면 △즉시 현장에 출장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관기관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사태를 신속히 수습하며 △진행경과 및 조치사항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초국적 기업 통제할 방법은?
박 보좌관은 "부도나 폐업으로 정리를 하는 경우 현지 노동자들이 당하는 피해는 크지만 사업주가 도주를 하여 처벌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진출국과 협의하여 퇴직금이나 임금보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정부차원에서…강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한국 내 모기업이 있는 경우, 한국 내에서 압력을 가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방법에 대해 법률이나 규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며 해외에서 부당노동행위를 한 기업에 대해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 새로운 입법을 제안했다.
1976년 제정돼 2001년 개정된 OECD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The OECD Guidelines for Multilateral Enterprises)의 적극적인 활용도 거론됐다. 가이드라인은 다국적기업에 대해 △고용조건 협상 중에는 사업장 이전 위협이나 노동자 전근 위협 금지 △고용조건의 합의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 △정리해고·사업장 폐쇄 시 노동자와 정부당국에 통보할 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각국에 나라별 연락사무소(NCP: National Contact Point)를 두고 위반 사건의 접수·처리와 가이드라인 홍보 등을 맡도록 했다.
하지만 한국의 NCP는 노동탄압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6월 NCP 연례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 NCP가 설치된 2001년 5월 이후 단 3건이 접수·처리되었을 뿐이다. 황필규 변호사(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한국의 NCP는…처리의 기준과 절차 등이 뚜렷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고, 특히 해외에서 이를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며, 그 처리절차의 공정성이나 객관성 역시 충분히 담보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NCP는 산업자원부 차관이 위원장인 외국인투자실무위원회에서 맡고 있고 실무는 산자부 투자정책과에서 수행하고 있다. 황 변호사는 "투자유치를 주목적으로 하는 외국인투자실무위원회가 NCP로 작용함은 적절하지 않"다며 "노동계나 시민사회단체, 전문가집단을 포함하지 않는 정부기관만의 구조 역시…실효성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실태파악과 공동대응 위한 네트워크 절실
이창근 민주노총 국제부장은 "해외진출기업의 노동탄압과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고 대응하는 상시적인 네트워크 체제를 국내에 건설할 필요가 있다"며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사회단체·인권단체·노동단체·진보정당 등이 협력하면 정보공유·여론화·직접적인 연대와 지원·현지투쟁 지원캠페인 등 다양한 사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배준범 민주노동당 국제부장도 "가장 초보적인 수준에서는 탄압사례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하고 공론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시혜적인 입장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은 지속성도 실효성도 없다는 것이 지난 국제연대운동의 역사"라며 "각국 운동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관점과 이에 기반한 프로그램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 국제부장은 "해외진출기업에 대응하는 가장 큰 원칙은 현지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적극 지지·지원하고, 노조결성을 위한 유리한 국내외적 조건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다음달에 동남아시아 노조 활동가를 초청해 훈련과정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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