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은 한 번 타오르고 끝날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계기로 더욱 본격적인 자주적 학생회 운동, 교육 정상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운의 불길은 거기에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학생회 직선제 운동을 비롯한 1987년 직후의 운동은, 오히려 1989년부터 시작된 ‘참교육 운동’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1980년대 학생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본고사 폐지와 내신성적 반영, 대학입학인원 확대, 전일수업제 대학 운영, 과외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교육정책을 발표했다. 내신성적 반영은 고등학생들을 더욱 성적경쟁 속으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과외금지 이후 과외가 음성화되자 정부는 학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전면 허용하였고, 그 결과 학생들은 강제적인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그 당시의 인사는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도 전두환 정권의 정책에 따라 뒷전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입시경쟁 강화와 학교에서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억압적인 학교 상황, 열악한 교육 등이 청소년들에게 미친 영향은, 1980년대의 자살학생 수 증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자살한 청소년들의 유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살했던 학생들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써있었다.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2차 방정식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까?” 특히 1986년 서울사대부속여중 3학년 학생이 남긴 유서에 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구절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참교육”을 내세우며 창립식을 가졌다. “참교육”은 일그러진 교육 현실에 대한 저항의 기치였다. 전교조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던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참교육 운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애들을 독재체제에 적합한 인물로, 말단 병사나 노예처럼 압박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안티감이 (참교육 운동은) 굉장히 강했다. …학교는 애들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군대교육이나 일부 교장의 사리사욕이나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깐. 그런 것들이 아팠다. 완전 비교육자들이었고 비교육적인 분위기였다.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억압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에 전교조의 “참교육” 구호는 괴로운 학교생활을 경험하고 있던 청소년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1989년에 고등학생이었던 구정인 씨(미림여고 소모임 활동)는 “입시경쟁 때문에 학생들이 3일에 한 번씩 죽는 상황에서 교사들도 전교조를 통해 참교육이라는 구호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이 아니라 살리는 교육…. 교사들의 양심선언이었다. 단순히 노조운동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살리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콩나물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구호가 너무나 호소력 있게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회상했다.
그랬기에 1989년에 시작된 ‘참교육 운동’은 교사만의, 전교조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참교육 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교조였고 그것을 주도한 것도 전교조였지만, 참교육 운동의 주체는 비인간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모든 교육주체들이었다. 전교조의 생각과 학생들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방향과 대의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청소년들은 참교육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뿐 아니라 스스로 참교육 운동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했다.
“선생님을 지키자!”에 담긴 뜻
정부는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나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에 대한 해임.파면.면직과 함께 사법처리를 강행했으며 그 결과 1989년 9월까지 1700명이 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전교조 교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차에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던 ‘좋은 선생님들’에게 핍박이 가해지자 인간적인 분노까지 더해져 학생들의 운동은 대중적으로 번져갔다. 운동 속에서 학생들이 내걸었던 “선생님을 지키자!”라는 구호는 그런 분노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교조 교사를 지지하고 지킨다는 것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참교육의 기치에 대한 동의였고, 강제적 보충수업.자율학습, 입시경쟁 등으로 얼룩진 교육에 대한 반대였다.
학생들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리본달기, ‘밤샘공부’(하교 거부), 수업시간에 전체 학생이 뒤로 돌아앉기에서부터 점거농성, 단식농성, 시위, 심지어 투신까지…. 학생들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고 참교육을 실현시키기 위한 저항에 발 벗고 나섰다. 광주 광덕고와 문성고 학생 3천여 명은 이사장실 점거 농성으로, 광주 동아여중고생 4천여 명과 송원학원의 중고생 8천여 명은 운동장 농성으로 징계위원회를 무산시켰다. 서울 구로고등학교의 류호철 씨 등 2명은 “직위해제 철회” “참교육 실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3층에서 투신하여 참교육에 대한 절절한 열망을 보여줬다. 인천 세일고의 경우, 해직된 선생님 수업에 대리강사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수업을 거부한 채 한 달 간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보고된 것만 하더라도 1989년 한 해 동안 전교조를 지지하며 투쟁에 나선 전국 학생들의 수가 250여개 학교, 47만 명을 넘어섰다.
단위 학교를 넘어선 싸움
싸움은 개별 학교 단위에서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6월 17일 연세대학교 광장에서 열린 ‘참민주교육을 위한 고등학생결의대회’를 비롯하여,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부고협), ‘마산.창원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마창고협), 그리고 ‘나주지역고등학생연합’, ‘목포지역고등학생연합’ 등의 결성은 학교를 넘어서 지역별로 이루어진 고등학생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특히 광고협은 최초로 결성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고협은 20여개 학교에서 중고생 2만여 명이 참여한 연합집회를 조직하고, 같은 날 5천여 명이 참가한 전남대 시위 등을 실행했다. 이후에도 광고협은 광주 시내 전학교 학생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해직교사들의 출근 투쟁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자주적 학생회 투쟁의 결실로 생긴 학생회연합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부고협도 탄압을 뚫고 부산대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전교조를 지지하는 투쟁에 나섰다. 마창고협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의 연합체들도 정부와 학교의 탄압 속에 힘겹게 참교육 운동을 해나갔다.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당함에 따라 광고협 이형준, 부고협 의장 황순주(둘은 11월22일 시작), 남서울상고 학생회장 김설준(11월23일 동참), 마창고협 부의장 전경국(11월26일 동참) 등 4명의 학생들은 평민당 중앙당사에서 구속학생 석방과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여 각 지역 고협들의 연대를 실천했다. 학생들은 4인의 단식 농성을 지지하며 동조 행동에 나섰다. 광고협 집행부 26명이 전남대에서 4일간 동조단식을 했고, 전남대 5.18 광장에서 6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지지집회를 가졌다. 부고협 70여 명은 부산대에서 이틀간 단식농성을 벌였고, 서울 평민당사를 격려 방문한 학생 2백여 명도 규탄집회를 가졌다. 전교조도 호응하여 단식투쟁 지지와 전교조 탄압 분쇄를 위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고등학생 대표자 4인은 12월 2일 ‘학생탄압 분쇄 및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사, 학생, 학부모 결의대회’를 가진 후 단식농성을 풀었다.
이후 학생들은 학교나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1991년 전남 보성고의 김철수 씨는 노태우 퇴진과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했다. 이런 식으로 김철수 씨를 비롯하여 심광보 씨(1990년 분신), 김수경 씨(1990년 투신) 등이 전교조와 학생들에게 가해진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교사 김융희 씨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 투쟁에서 목숨을 던진 학생들”이라며, 학생들이 죽은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분노가 들끓었다고 회상했다.
독자적인 길을 닦은 청소년들
이처럼 참교육 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교사들의 양심적인 외침과 요구가 청소년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비인간적 교육 속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전교조 창립이라는 계기로 더욱 촉발되었다.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유대 속에 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우리 대신 희생당한다는 생각에 참교육 운동에 한층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학교 안에 존재하던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흥사단 아카데미나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YMCA 등의 공개단체들도 조직적인 운동에 한몫했다.
구정인 씨는 “고1부터 탈춤반 활동을 하고 봉천놀이마당에서 청소년패였던 ‘바발패’ 패장이 되었는데, 학생의날 준비위원회 회의를 나가보니 KSCM, 흥사단, 바투 등 단체와 개별학교 소모임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때 행사를 하고 처음 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라며 소모임들이 참교육 운동에서 한 역할을 증언했다. 구정인 씨는 미림여고에 재학 중이던 1988년 12월에 학내 소모임을 꾸리고 학생회 직선제 투쟁과 학생회 선거운동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참교육 운동이 시작되자 그 흐름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 교사 한 명이 전교조였는데, 이분이 징계위에 회부가 된 상태였다. …전교조가 계속 출근투쟁을 하니까 우리 소모임에서 유인물을 뿌리는 상황이 됐다.”라는 것이다. 미림여고 학생들은 이후 을지로에 있던 재단사무실 앞에서 징계위원회 개최 저지 시위를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소모임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부고협 1기 의장을 맡았고 단식투쟁을 하다 제적당했던 황순주 씨(1987~1989년 용인고 학생회 활동)는 1988년에 학내 시위를 벌여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했다. 황순주 씨는 자율학습 반대 등을 명확하게 지시하며 용인고 최초의 직선제 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후 학생회장들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 고민을 공유하였다. 그러다가 전교조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1989년 8월 이 학생회장 모임은 부고협으로 전환된다. 이는 전교조 사수 투쟁 이전부터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주체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순주 씨는 참교육 운동과 그 이전부터 있어온 고등학생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산지역 고등학생들도 이런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학생을 대표하든 학생회를 대표하든 연합체 형식의 조직을 준비해서…. 당시 정권에서 전교조 교사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선전했는데, 선생님을 뺏기는 상황이었고 교육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촉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문제도 같이 제기하자면서 나갔던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각각 주체별로 준비를 해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교조 투쟁만을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었다. 교육 주체로 자주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전교조 교사를 보호하는 것은 일부분이었다.”
학생들이 전교조 지지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운동을 펼치려 했음은 여러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광고협은 “우리는 단순히 교원노조 지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교육의 주체인 학생으로서 당연히 주장해야 할 권리인 참교육과 민주교육을 목청껏 부르짖으며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척결하고 학내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발전적인 싸움으로 한 차원 높은 싸움을 온몸으로 전개해야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1989년 7월 20일 발표했다. 마창고협도 같은해 9월 30일 발족선언문에서 “우리 학우들의 단결된 힘으로 우리를 입시 전쟁과 철저한 이기주의적 인간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풍토를 개선하고 민주 시민의 예비단계로서 모든 학생회 활동들을 자율적으로 민주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학우들의 자율적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의무와 순종적 인간만을 요구하는 관료주의적 교육자와 재단에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여야 하며 또한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라며 그 창립목적을 밝히고 있다.
탄압받는 고등학생운동
참교육 운동을 거치면서 고등학생운동은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정부의 탄압은 주로 기존의 대학생운동 세력 등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참교육 운동에서 중고등학생들이 격렬하고 대중적인 힘을 보여주자 직접 학생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하였고,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운동세력들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중고등학생들을 회유하는 한편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정부는 학생회나 소모임 등에 대한 전면 압박에 들어갔다. 체벌과 징계를 통해 주동자들을 처단하는 한편 학생회의 독립적 예산권을 뺏는 등 학생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학생회의 권한을 상당부분 위축시켰다. 참교육 운동에 역량을 집중한 조직들은 그러한 탄압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 김융희 씨는 당시 정부의 탄압을 이렇게 전했다. “애들 요구를 수용해서 변화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주동자에 대해서는 엄격히 탄압했다. 교사와 경찰은 물론 교장까지 나선 전방위 압박에다 굉장히 엄한 체벌과 징계도 있었다. 학생회도 제도적으로 축소시켰다. 그때는 학생회비를 따로 걷어서 학생 예산권이 독립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다. 대대적으로, 그때부터 억눌린 게 지금까지도 온 것이다. 별로 회복이 안 되었다.”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이 보여준 것
정부는 참교육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교조가 학생을 선동한다.” “전교조가 학생을 이용해 먹는다.”와 같은 비난으로 청소년들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을 폄하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수적인 성인들은 상당히 불안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선전은 먹혀들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주체로 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인 집단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전교조 사수와 학생자치권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기도 했으며 투쟁 과정에서 자율학습 폐지 등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비록 “참교육”에 대한 공감이 학생들의 대중적 투쟁을 끌어내긴 했지만 당시 학생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청소년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전교조 교사들을 통해 대변되기만을 바라진 않았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전개한 참교육 운동에 대해 구정인 씨는 “4.19, 5.18에 이어 고등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자기 현실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생각이 확고했다.”라고 말했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사회변혁의 주체임을 참교육의 불꽃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고등학생운동은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변혁.민주화의 관점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혼재해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오성 씨(1989년~1991년 대원고에서 활동)에 따르면, 그 당시에도 교육이나 학생들의 삶, 권리에 집중한 쪽과 정치적 이슈에 집중한 쪽의 내부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앞서 인용된 마창고협 발족 선언문 등 당시 각종 선언문이나 성명서의 표현들도 청소년들의 권리 의식을 보여주며, KSCM이 발표한 결의문에는 “학생들에 대한 극심한 인권 탄압이 수시로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교육현실은 실로 분노할 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인권”의 언어가 조금이나마 엿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민주화’라는 흐름 속에서 청소년들의 권리 찾기가 독립적인 운동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1980년대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은 비록 대대적인 탄압과 사회운동 전반의 침체로 인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지만, 그 당시부터 청소년들의 권리의식 성장과 청소년인권운동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1980년대~1990년대 초반에는 “청소년운동”이란 말이 아닌 “고등학생운동”이란 표현을 주로 썼기에 그 현장성을 존중하여 이렇게 표기했다. 대학생들의 운동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중학생들도 참여하긴 했으나 다수가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에서 고등학생운동이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보인다. “중고등학생운동”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 참교육 운동 이전의 학생들의 저항에 관해서는 이전 기사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 참교육 운동 이전의 학생들의 저항에 관해서는 이전 기사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덧붙임
유윤종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