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그 영화를 봤을 때는 좀 심심하고 싱거운 영화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해월은 동학의 교조 최제우와 녹두장군 전봉준으로 이어지는 동학 지도자 계보의 중간쯤에 놓여 있고,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녹색평론> 등을 통해 해월의 존재를 몇 번 다시 생각할 계기가 있었다. 그리고 십 수 년 만에 <개벽>을 다시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완연히 새로웠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몇 장면이 있다. 해월의 가족들은 동학이 탄압당할 때 붙잡혀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하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한다.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해월의 아내는 해월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해월은 밭을 갈다 말고 깊은 생각 속에 잠겨 있다. 아내가 묻는다. “뭘 그리 생각하세요?” 해월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한다. “꽃잎을 매단 나뭇가지가 부러진 것을 볼 때, 괭이질 하다가 허리가 잘린 지렁이를 볼 때마다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소” 영화 속에서 해월은 언제나 도망을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나무를 심고 물을 준다. 그 손길이 참 정성스럽다. 가장 마음에 남은 대사는 이런 것이었다. 1894년 무렵, 전봉준을 중심으로 혁명의 열기가 들불처럼 타오를 때 교주인 해월의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동학 내에서 점점 커진다. 해월은 반대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봉기하면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벽은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면서. 다급한 제자들이 묻는다. “선생님, 개벽이 대체 뭡니까?” 해월은 이렇게 답한다. “여기 있는 모두가 스스로 하눌님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천지만물 모두가 하눌님임을 알 때, 그때야 개벽은 오는 것이외다.” 나는 이 대사가 참 오래 남는다. 개벽은 결코 올 수 없다는 말일까. 개벽이란, 거듭난 삶이란, 새로운 세상이란 뭘까. 나는 해월 선생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일하는 전교조 밀양지회에서는 1년에 두 번 ‘밀양 교육사랑방’이라는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에는 ‘학생 인권’을 주제로 삼았는데, 어제는 인권운동사랑방 배경내 활동가와 이슬 청소년활동가를 초청해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제목으로 첫 강좌를 열었다. 강좌를 듣는 도중에 더러 해월 선생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씀을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내가 아이들을 하눌님처럼 모실 때, 아이들이 나를 하눌님처럼 섬길 때, 그 순간이 개벽이다. 개벽은 수백 수천 년 뒤의 어느 특정한 시간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배경내 활동가의 강연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명멸했다. 아이들과 주고받은 작은 상처와 작은 기쁨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몇 번씩 나로 인해 하눌님이 되기도 하였고, 상처 입은 가련한 짐승이 되기도 하였다. 그 순간은 개벽이기도 했고, 영원한 폭력이기도 했다. 문득 내 자리가, 내가 사는 이 시간이 엄중하게 육박해왔다.
FTA 선전전 속에서 꿈꾸는 ‘유로지비’
우리 지역에서 몇몇 사람들이 ‘FTA 저지 실천단’을 꾸려 매주 수요일마다 함께 선전전을 하고 있다. 농민회 회원, 전교조 교사, 밀양대 학생들, <녹색평론> 독자들, 할 때마다 얼굴이 바뀌긴 하지만 매번 열너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선전전을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액정 화면에 노트북을 연결해 한미 FTA 관련 동영상을 틀고 범국본에서 나온 유인물을 돌리고 서명대에서 서명을 받는 정도다. 몇몇은 핸드마이크를 들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즉석 연설을 하기도 한다. 작은 도시에서 이나마의 실천도 흔한 일은 아니어서 지나가는 시민들은 흥미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거북이의 걸음처럼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걷는 기분이다. 이곳은 경상도고, ‘보수적’인 도시 기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농민회도 경남에서 제일 늦게 생겼고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히는 극우정치인이 내리 세 번 이 곳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한미 FTA같은 사안에 작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자위하기도 한다. 가끔씩, 서명대에 서있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찾아온다. “쌤, 이런 데서 뭐하셔요~~” 아이들은 까불지만 그래도 나눠주는 유인물은 반갑게 받아가고 더러 서명에 참여하기도 한다. “너거들 미래와 관련있는 일이란다. 꼭, 찬찬히 읽어보렴.” 꽁무니에 대고 한마디 덧붙여준다. 이것은 내 진심이다. 수업 진도에 쫓겨, 시험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던 세상의 진실을 학교 바깥에서 작게나마 전해주고 있다는 느낌은 우선 나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이 숱한 좁은 시가지에서 유인물을 나눠주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부끄럽고 쑥스러운 일이다. 그럴 때 나는 사상가 리 호이나키의 글에서 읽은 러시아의 고행승 ‘유로지비’를 떠올린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낯설고 바보스러운 행위로 사람들을 웃기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고행을 일삼는다. 그들은 그 바보스러움으로 ‘그리스도의 자유’를 혹은 그 순간의 ‘개벽’을 만났을까.
한미 FTA에 대해 조금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단행본도 살펴보고 인터넷신문에 연재되는 기사를 인쇄해서 읽기도 했다. 황우석 사태 때에는 생물 공부를 했는데 이제는 한미 FTA 때문에 경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공부에 진척이 붙질 않았다. 더 깊이 파고들 능력도 없었지만, ‘아, 이건 결국 ‘인식’이 아니라 ‘행동’의 영역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짙은 무력감과 자조를 느낀다. 그 감정들은 쓸쓸한 외양을 띠지만 실상 그 속에는 세태에 대한 굴종과 가치에 대한 냉소, 타인의 시선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무력감과 자조는 병든 감정이다.
이라크 파병 반대에서부터 새만금, 천성산까지 일찌감치 ‘잘 안 될 거’라고 꼿꼿이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논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평택 문제에 대해서도 ‘안 될 거’라 말하고 한미 FTA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한다. 국가가 벌이는 일, ‘경제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은 일, 미국과 관련되거나 ‘삼성’ 따위 기업집단과 연관된 일이라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유로지비’같은 ‘바보’가 되지 못함이 부끄럽다.
나는 오기를 부려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동요를 부르고 싶다. 나는 동요에 담긴 슬픔의 힘을, 그 슬픔으로 인한 놀라운 정화의 능력을 안다. <과수원길>, <고향의 봄>, <섬집아기>, <오빠생각> 이런 노래들의 끝에 “평택을 지키자, 한미 FTA를 막아내자”고 외치고 싶다. 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백석, 박용래, 김용택의 농촌시편들을, 1960년대 경북 산골에 살던 이오덕 선생님의 아이들이 지은 보석같은 시들을 낭송하고 싶다. “농업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땅과 고향을 지키자. 지금 이 모습대로 살 권리를 다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입만 열면 ‘경쟁력’,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더드’, 이런 따위 말만 중얼거리는 ‘세상의 바보들’을 향해서 말이다.
우리 모두 ‘바보’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은 좀더 본질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은 ‘이성’과 ‘논리’ 이전이거나 ‘이성’과 ‘논리’를 한참 지나온 곳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지금 ‘이성’과 ‘논리’ 위에 서있다고 믿는 ‘세상의 바보들’을 향해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이 옳다. “오오, 우리는 바보가 되고 싶어. 그러나 너희들, 돈밖에 모르는 바보는 아니야. 우리는 고르게 가난한 세상을 그리워하지. 우정은 얼마나 기쁜 것인가. 대추리 도두리 할아버지 할머니 힘내세요.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 공부에 지친 아이들, 힘없고 약한 우리 모두 함께 어깨를 걸고, 친구가 되어요.”
아, 이 모든 파괴와 맹목, 전쟁은 이제 그만! 바보들은 외치며 노래부른다. 그 순간 세상의 힘없고 약한 모두는 하눌님처럼 모셔질 것이다. 해월 선생님은 말씀하셨지. 그때 개벽이 이루어진다고. 평택 싸움은, 한미 FTA 싸움은 지금 패배할지언정, 우리는 영원히 이길 것이다. 우리들, 바보가 되자.
덧붙임
이계삼 님은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