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생김새만큼이나 참 다양하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거부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가령,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개인정보의 누출 우려 때문에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사람, 이마트에 가지 않는 사람, 자가용 차를 타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유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듯,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통의 힘을 믿는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런 운동은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문제들도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자, 당신에게 강요하는 대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그저 묵묵히 실천하며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는 우리 옆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듯,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통의 힘을 믿는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런 운동은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문제들도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자, 당신에게 강요하는 대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그저 묵묵히 실천하며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는 우리 옆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 ‘적령기’라는 녀석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그 ‘적령기’라는 나이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내 고민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고민으로 (아직) 결혼 결정을 내리지 않은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물론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사람에 비해 결혼이라는 인생의 방정식에 (자발적이라 주장하며) 편입되어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나라고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괜히 쓸데없이 이런 문제에서조차 아웃사이더인 척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며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미꽃 넝쿨이 우거지고 앞마당에는 초록색 잔디가 우아하게 깔린 그런 집을 상상했던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결혼, 내 길이 아닌가보다...
그렇다고 특별한 계기나 머리를 번쩍하게 하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결혼이 원래부터 그러했던 보편적이고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국가 체제가 가족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1부 1처제를 명문화하기 시작했다는 등등의 얘기를 안 들어본 건 아니지만, 그것으로 결혼하지 않을 동기가 충분히 부여되지는 않았다. 처음엔 가뜩이나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덜렁대는 성격 덕에 제대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하는 자신 없음과 불안함, 또 낯선 길을 간다는 부담감에 망설였다. 그러다가 나중엔 만날 나만 보면 ‘시’자 붙은 사람들(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등) 욕하기 바쁜 친구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레즈비언 친구를 보면서는 지금의 결혼이라는 것이 특정한 가정의 형태만을 ‘정상가족’으로 간주하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또 돈 벌랴 아이 기르랴 이중고에 시달리며 가족 내에서는 늘 덜 중요한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친구들을 보면서는 남/녀의 위계관계를 근간으로 현재의 가족이 유지되고 있음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아서 내가 아무리 “‘미혼(未婚)’이 아니라 ‘비혼(非婚)’이거든요”라고 외쳐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았다. 사회적 적령기를 넘겨갈 쯤 친척들을 중심으로 한 주변사람들의 은근한 압력이 시작되었고 작년 동생의 결혼식 즈음해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까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나를 포기 못한 끈질긴 주변인들의 거센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애꿎게도 우리 엄마는 ‘딸 붙들고 사는 모진 엄마’가 되어야 했고 나는 ‘남자친구 사귀기 위해 교회에 나가보라’는 전도 아닌 전도를 받기도 했다.
결혼식에 발길을 끊게 된 사연
그러던 내가 언제부턴가 결혼식에 발길을 끊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매번 똑같이 진행되는 결혼식은 한심했고, 무슨무슨 국회의원 혹은 무슨무슨 대학교수들이 나와서 지껄이는 말도 안 되는 주례사는 따분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결혼식장에 참석하는 것이 무슨 큰 죄나 되는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 우스웠고, 결혼을 이성간 사랑의 정점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성애자들이 이반 친구들에게 말도 안 되게 ‘남친(혹은 여친)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시츄에이션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는 결혼식장 식당 단골 메뉴인 갈비탕도 싫었다. 결혼식이라는 환경이 그래서인지 온통 그렇고 그런 얘기들뿐인 뒷풀이는 지겨웠고, 여성에게 모욕적일 수 있는 성적 게임을 무슨 통과의례인양 당연시하는 분위기는 경악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언제 결혼하냐는 지겨운 질문을 고장난 라디오에서 반복적으로 듣는 것마냥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고 살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굉장히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혼이 이런 줄 몰랐어’라며 울고 짜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운데 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자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엔 과거와는 다르게 비혼의 삶이 다양성 차원에서 점점 인정받고 있는 추세인 것 같다. 하기야 비혼 인구가 얼만데……. 하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 보면 최근엔 비혼인, 특히 비혼 여성들에 대해선 미국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일거라 생각하는 고정관념도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소설 『B 사감과 러브레터』에서 ‘신경질적인 노처녀’로 그려진 ‘B 사감’의 이미지는 벗어났으니 그나마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결혼에 대해 던지는 정치적 질문
최근 들어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 대한 모색과 이성애적 결합 가족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는 각종 법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결혼하지 않는 삶은 물론 각자의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내린 결정이지만, 동기야 어찌되었건 간에 그것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넘어 사회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의 그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삶이란 매순간 계획적이기보다는 온통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믿는 게으르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란 인간은 이런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멈칫하고 망설이기 일쑤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나를 결혼에 대한 경계와 증오로 똘똘 뭉친 ‘신념의 강자’처럼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나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비혼에 대한 나의 결정이 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결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덧붙임
오리 님은 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