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가면 충분한 보수, 인정받는 실력, 몰두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건강한 자식, 수족처럼 시중 잘 들어주는 아내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 정부까지 가졌는데 난, 난… 내가 가진 게 뭐야. 난 가진 게 뭐냐고…….”
그녀가 콜드크림을 바르며 어떻게든 지워보려 했던 것은 목의 주름으로만 남아 있는, 도대체 보상받을 길 없는 결혼 이후 그녀의 시간이었다. 결국 그녀가 남편을 향해 뱉어내던 독백은 “말해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이렇게 늙고 초라했었니”라는 그녀의 흐느낌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나에게도 스무살이 있었고 서른살이 있었다”고 말한다. 한편 다름 아닌 남편의 불륜 상대, 세희는 명문대 법대를 나왔지만 자신이 배운 것을 살려 해볼 수 있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 면접관으로부터 “이력서 갖고 돌아가 결혼이나 하도록 노력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스무살, 서른 살의 여자라면 사실 현주의 억울함과 분함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혼인 젊은 여성들, 결혼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거나 결혼을 유예하는 여성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들은 그녀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쓰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실제로 결혼이 얼마나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시간을 쓸 수 없도록 만드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비혼 여성들을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개개인들로만 보는 것은 비혼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이 여성들이 행하고 나누며 맺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돌봄의 관계들을 없는 것처럼 만든다. 이들은 가족 바깥에서 단독자로서 살아가지 않으며, 이들이 꾸려가는 다양한 돌봄의 관계들이야말로 비혼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비혼으로 살아가는 것은 차라리 가족 (실패)의 결과이자 효과라고 보아야 하며, 이들의 비혼은 결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가족의 안팎에서 벌이는 협상과 경합, 적어도 망설임의 시간이다.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는 여전히 강력하다. 그것은 그 제도가 보장하는 것들이 많아서 유혹적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미 돌봄은 가족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비혼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질문은 “늙어서 병들면 어떡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결혼을 한 여성들에게도 역시나 중요한 질문이다. 나의 엄마도, 사실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모든 것을, 혹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했으면서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저 질문이 중요한 (심지어 더 가깝고도 급박한) 질문임에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내게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이 저 질문을 꺼내 들어보이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들이 저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이들어감에 대해 진지하게 준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나이 들어갈 시간을 엄마와 내가 따로 또 같이 준비하는 것에 관한 생산적인 대화를 방해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엄마가 직접 경험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우리 사이의 대화의 중요한 교훈이자 참조점으로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가.
여성의 비혼은, 흔히 이야기되듯 마치 커피전문점에서 팔짱을 끼고 무슨 커피를 먹을까 고르는 것처럼 결혼과 비혼 이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저울질하고 따지며 고르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야기되어 온 여성의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찾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자, 여성들이 나이 들어감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사유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임
자루 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