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단속의 광풍, 청소년인권운동을 부르다
2005년 2월, 새 학기가 시작된 중고등학교에는 어김없이 두발단속의 광풍이 몰아쳤다. 서울의 ㅅ공고에서는 개학 이후 첫 등교일에 150여명의 학생이 교문 앞에서 집단으로 머리를 잘렸다. 수업시간에 머리 자르는 도구(바리깡)를 들고 머리를 자르는 대구의 ㄴ고, 아침마다 교문에서 가위를 들고 자르는 서울의 ㄱ학교, 두발단속으로 걸릴 때마다 체벌하는 학교, 교문에서 기합을 주는 학교…….
학기 초 기강을 잡겠다고 나선 안하무인 학교의 횡포 속에 청소년들의 인권은 연일 잘려나갔고, 시도교육청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도 학교의 무자비한 인권침해를 멈추게 해달라는 청소년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학교의 두발단속을 제보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면서 학교의 강제이발과 두발단속은 온라인에서부터 이슈로 떠올랐다. 청소년 관련 인터넷 사이트 ‘아이두’ 에서 개설한 ‘두발제한폐지’ 서명사이트(http://nocut.idoo.net) 게시판에는 2005년 3월에 1만3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두발자유 서명을 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의 네티즌청원운동(아고라) 게시판에서도 ‘두발규제 폐지’가 여론을 모았다.
온라인 뿐 아니라 학교 내 서명운동과 거리 캠페인도 시작됐다. 분당정보산업고등학교 학생들은 학내에서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여 1천명이 넘는 지지 서명을 받았다. 진주지역에서는 청소년단체 ‘행동하는 청소년’에서 두발자유 거리캠페인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앞서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주최로 열린 청소년 대토론회에서는 많은 청소년들과 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두발자유 운동에 대한 다양한 전략을 논의하고, ‘두발자유 학생운동본부(아래 학생운동본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토론회를 준비할 때부터 참여했던 이송이(당시 고3)씨는 “처음엔 토론회한다고 뭐가 바뀔까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기도 했었지만, 토론회가 끝나고 누군가가 ‘이대로 흩어지지 말고 뭔가 해보자’고 하면서 토론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여 학생운동본부를 만들고, 무엇을 할지 논의했다”며 “그런 운동의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지 정말 신기했고, 그것이 5월 14일 집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5.14 청소년 행동의 날
2005년 5월은 그 어느 해보다 두발자유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다. 학생운동본부에서 준비한 5월 14일 ‘두발자유와 인권을 위한 5.14 청소년 행동의 날’이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학생인권수호전국네트워크에서 마련한 ‘두발제한폐지·학생인권보장을 위한 청소년 거리축제’가 광화문 KT앞에서 진행됐다. 대구에서도 대구청소년문화아케이드 ‘우주인’이 두발제한 폐지 청소년거리축제를 열었다. 한편, 사회단체들은 ‘두발자유를 위한 시민사회단체운동본부’를 만들어 청소년 집회 준비를 지원하고 참가 학생에 대한 학교 측의 징계 시도를 막아내는 데 조직적 힘을 보탰다. 시민사회단체 운동본부 활동을 한 이근미(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 사무국장은 “비록 당시에 (교육당국이나 국가인권위 등이) 두발규제에 대한 금지조치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발이 인권의 문제라는데 사회적으로 기본 합의를 이룬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5.14 이후에도 학내 시위와 캠페인은 계속됐다. 학기 초 집단 강제이발을 당한 송파공고에서는 5월 19일 두발자유를 외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학내시위를 벌였고, 26일 성남 풍생고에서는 1천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운동장 시위를 벌였다. 또 수원과 전주에서도 여름 이후 캠페인과 집회가 이어졌다. 당시 풍생고 3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류득선씨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각 반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모여서 10여분 정도 구호를 외치고선 해산했다”며 짧았지만 교내에서 구호를 외치고 집회형식을 갖춘 보다 집단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기억했다.
2005년 두발자유화 운동의 특징은 교내 집단 시위, 거리 집회 등이 이전보다 조직적으로 그리고 몇몇이 아닌 집단의 행동으로 벌어진 점이다. 2000년에도 청소년인권운동 단체의 거리 캠페인과 학내 서명운동이 전개됐지만 2005년은 교문을 넘어선 준비된 집회로 청소년 인권운동의 조직적, 집단적 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학내외 시위를 둘러싼 청소년들 사이의 견해 차이, 두발규제와 완화, 자유와 자율 사이의 이견은 청소년인권활동가 사이에도 존재했지만 주요 쟁점은 이동하고 있었다. ‘두발자유는 기본권’이라는 이해가 자리 잡으며 2005년을 기점으로 청소년인권운동의 조직화와 지속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이면, 힘이 돼!
한편, 2005년 청소년의 집단적 의사표현의 또 하나의 사건은 바로 ‘입시경쟁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이다. 청소년의 자살 보도가 줄을 이으면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은 5월 7일 자살학생 추모제를 갖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내신비중을 강화한 2008 입시개정안으로 술렁이던 학교와 언론 그리고 성적비관 자살이 늘어가도 팔짱끼고 구경만 하던 교육당국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희망’의 이근미 사무국장은 “추모제로 마련된 것인데, 당시 내신등급제 강화로 같은 반 친구들끼리도 경쟁하면서 압박받던 청소년들은 내신등급제 반대를 주장하며 참여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추모제는 청소년의 괴로운 현실을 외치는 현장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집단행동에 교육당국은 행사 취소 압력부터 교사, 장학사 현장 배치까지 실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일부 언론은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내신 폐지, 본고사 부활’로 몰아가며 청소년들의 주장을 왜곡하기도 했다. 사회 근간을 이루는 교육제도에 대한 청소년들의 집단적 문제제기는 정권과 교육부처, 기득권 모두에게 금기였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보다 일단은 참아야할 ‘위험한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광화문에 모였고, 추모제를 치렀다. 이근미 사무국장은 “학교와 교육청의 징계 위협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거리로 나왔다”며 “청소년들의 주체적 힘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조직적이고 집단적 힘이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건”이라고 기억했다. 두발자유 운동과 더불어 자살학생 추모제로 뜨거웠던 2005년 5월은 청소년들의 집단적 목소리가 학교의 높고 견고한 담장을 훌쩍 넘어섰다.
뿔뿔이, 되돌이표, 한해살이 운동을 넘어!
2000년 이후 최대의 조직적 활동을 보인 2005년 두발자유 운동은 하반기 들어서면서 소강국면에 들어섰다. 지역 청소년모임이나 개별 학교에서 간헐적인 캠페인과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지만 상반기와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예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해살이’ 운동 속에 진전 없이 매년 제자리인 논쟁, 공유할 수 없는 경험, 남지 않는 활동가라는 청소년인권운동의 한계는 결국 인권침해라는 형태로 청소년들에게 되돌아오곤 했다. 이런 뼈아픈 기억 속에 몇몇 단체와 활동가를 중심으로 2006년 2월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이 마련됐다.
인권운동사랑방,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발전하는학생회 가자 등은 ‘청소년인권운동어디까지 왔나’는 주제로 청소년인권활동가 워크숍을 열고, 공통의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전략을 구상하면서 워크샵 후속으로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아래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네트워크 전누리 활동가는 “네트워크는 2005년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흩어지면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모였다”고 말한다. 전누리 활동가는 “각개 분산돼서 한 가지 의제에 집중적인 힘을 쏟아보지도 못하고 항상 패배했던 기억들을 넘어, 느슨하면서도 서로의 운동을 공유하고 조금이라도 맞춰나가는 연대체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라고 네트워크의 시작을 설명한다. 아수나로 유윤종 활동가 역시 “운동적인 면에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요청되었던 건, 역시 정말 '한줌' 밖에 안 되는 청소년인권운동 진영이 스스로 좀 더 가시화시키고 운동 안에서 자기 영향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뭉쳐야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권운동사랑방 배경내 활동가는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말을 사회화시키고 블록화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며 “청소년인권이라는 주제가 주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자기 정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경내 활동가는 “물론 청소년운동 전반의 한계와 극복 대안을 만드는 건 우리의 또 다른 몫이지만 청소년인권 사안이 부침을 거듭하며 되풀이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청소년인권 운동이 독립적으로 제기되고 힘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중심에서
2006년 5.14 ‘청소년인권 행동의 날’ 집회를 준비하면서 가속이 붙기 시작한 네트워크는 청소년들의 학내시위를 지원하는 ‘스쿨어택’, 전국 6개 지역을 돌며 진행한 두발자유·학생인권법 통과를 위한 전국행진, 청소년 여름 인권캠프 등의 활동을 벌이며 숨가뿐 1년을 보냈다. 배경내 활동가는 “운동사회를 비롯해 우리 사회에 청소년인권의 문제가 상큼 발랄한 얘기, 혹은 어리광으로 여겨지지 않고 일정한 무게와 힘으로 제시됐다는 점과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2007년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네트워크 활동의 중요한 성과로 지적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네트워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배경내 활동가의 주장이다. 현재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를 하나의 고정된 조직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조직을 지원할 수 있는 네트워킹의 역할로 만드는 것이 남겨진 과제라는 것. 또 학생인권 사안이라도 인권침해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통찰로 총체적으로 보고, ‘학생인권’이란 말에 갇히지 않는 ‘청소년’인권운동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활동은 온라인 중심, 개별적·고립적 행동, 주체 단절 등으로 지적되어 온 청소년인권운동의 한계와 어려움을 하나 둘 넘어서고 있다. 실제 네트워크의 결성 자체가 바로 이러한 문제 해결의 과정이다. 물론 청소년인권운동이 가족·친구·교사를 상대로 하는 전방위 운동이라는 것, 합법을 가장한 학교와 사회의 반인권적 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것 등은 여전하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은 2005년과 2006년을 넘어 2007년으로 이어졌고, 현재 네트워크는 그 중심에 있다.
전누리 활동가는 “학내 시위나 청소년들 요구의 핵심에 두발자유가 있는데, 이는 10년이 지났어도 쟁취하지 못한 청소년인권의 의제로 상징적인 면이 있다”며, “그만큼 이 의제에서 승리한다는 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으로 두발자유를 넘어서 더 많은 의제 확장을 기대하며 “너무나 당연시되어서 그만큼 가려져있던 소수자의 문제, 더불어 무상교육 등의 사회적 의제에 청소년의 목소리가 직접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윤종 활동가는 “청소년인권운동은 단지 지금 성인들이 누리는 만큼을 청소년들도 누리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간,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