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는 이제 다시 작성되어야 한다. 한미 FTA가 이대로 체결되고, 발효된다면 사실상 헌법의 이 조항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주장이다. 너무 지나치다는 평이 있을 수 있지만, FTA 체제에서는 국민주권은 쉽게 부정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힘을 얻는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완성하는 FTA 체제에서 주권은 ‘시장(자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역할의 축소를 요구받는다. 오로지 평가의 기준은 ‘시장’이다. 시장의 독재를 보장하는 것이고,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자유주의적 전통에 따르든, 공리주의적인 전통에 따르든 결론은 동일하게 내려진다. “국가의 역할은 적어야, 그것도 많이 적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적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정부축소’로 족쇄가 풀린 기업가적 힘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정책적으로는 “△시장이 자원분배자로서 갖는 중심적 역할 재확인 △수요 측면에 무게를 둔 경제관리에서 공급 측면에 무게를 둔 경제관리로의 전환 △공적인 삶 및 ‘공공재’의 상품화”가 신자유주의의 속성이다.
시장의 독재가 지배하는 체제인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의 완결판인 FTA 체제에서는 시장이 주권자가 된다. 주권자인 시장의 요구에 따라 국가의 모든 역할은 맞춰져야 한다. 투자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도록 국회는 입법을 하고, 사법부는 투자자의 이윤을 보장에 방해를 하는 세력들에 법의 이름으로 철퇴를 가하고, 정부는 행정적인 지원을 한다. 그것이 비록 주권자인 국민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권력은 자본과 시장으로부터 나온다”는 게 더 정확해진다. 경제적인 측면만 놓고 보더라도 경제를 비롯한 “모든 영역을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해야 하는 사명을 갖는 국가는 한미 FTA에 따르면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권한을 대폭 제약함으로써 헌법 제119조 제2항이 예정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원리와 정면 충돌”한다. “국토와 자원의 균형있는 개발과 이용을 위한 계획 수립권”도 포기된다. 그럴 때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다. 나아가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기본적인 임무라고 할 때, FTA에 의해서 침해되는 인권을 보장할 수 없는 국가의 존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지 모를 일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완성태인 FTA 체제는 국민주권을 부정하고, 국가를 부정하면서 시장독재를 공공연하게 인정함으로써 헌법을 매우 나쁜 방향으로 개정한 결과를 낳는다.
부정당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3권 분립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입법·사법·행정 3권의 분립은 불문율이다. 입법·사법·행정권력은 상호 역할을 분담하면서 서로의 권력을 견제한다. 그 이유는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국가의 권력작용이 낳는 부정적인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가권력의 집중은 과도한 권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로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FTA 체제에서 3권 분립은 그 의미를 찾을 길이 없어진다.
한미 FTA의 유효기간은 10년이지만, 한미 FTA 협상 내용에 들어있는 역진방지장치(ratchet)에 의해서 조약이 폐기된 이후에도 기왕에 투자된 부분에 대해서는 10년간 그 효력이 더 지속된다. 결국 앞으로 최소 20년 동안 한미 FTA 체제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유럽, 중국, 일본, 아세안 등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시장과 FTA를 체결한다면 향후 이 나라는 FTA협정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될 것이다.
당분간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국회에서 FTA가 국민경제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서 너무도 많은 폐해를 낳기 때문에 FTA에 반하는 입법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외국인의 투자자-국가제소권으로 인해서 적어도 외국인 투자자를 제한하는 입법은 할 수 없게 된다. 사법부가 환경오염이나 인권침해를 낳는 외국인 투자자에 국내법에 따라서 형벌을 부과하려고 해도 2심제를 도입하고 있는 WTO에 비해 단심으로 운영되는 국제분쟁해결절차를 이용하여 국내법운을 제소할 수 있게 되어서 사법부의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런 예는 멕시코나 캐나다에서 이미 경험한 사례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행정부도 FTA 협정에 들어있는 역진방지장치나 이행의무부과 금지 조항 등으로 인해서 효율적인 정책집행수단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들이 공공부문 민영화에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민영화되어 버린 공공재를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이미 외국인 투자자가 이윤 창출을 노리고 투자를 했을 것이고, 그들의 이익은 무조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민영화된 국영기업들이 오로지 주식을 가진 투자자의 배당률을 높이는 경영을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이 이제는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FTA에 의해 대한민국의 입법·사법·행정권은 사실상 제한되거나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FTA 폐기만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길
결국 FTA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이미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원리를 정부 스스로 부정하는 과정이었다. 정부는 협상을 추진하기 전에 어떠한 국민들의 동의절차를 갖지 않았다. 국민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헌법을 개정하는 효과까지 갖는 한미 FTA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한 적도 없다. 심지어는 정부의 정책을 감시, 견제해야 하는 국회도 마찬가지다.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도 역시 정부는 국회의원들에게조차 컴퓨터 화면으로만 협정문을 보도록 하는 등 거의 의회 부정의 행각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오는 5월 20일 정부는 협정문과 부속서들을 공개한다고 했지만 그것도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한미 FTA 반대 목소리에 대해서는 집회·시위의 자유와 같은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들도 부정하면서 강도 높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한미 FTA 반대 시위를 억압하는 모습은 FTA 체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정부의 독재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FTA는 이미 곳곳에서 수차례 지적되어 왔듯이 생존권을 비롯한 모든 인권을 부정하면서 시장독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FTA와 민주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소중한 것이고, FTA가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매우 간단하다. FTA 협상을 폐기하면 된다. FTA 체제를 인정하면서 주권도 시장에 넘겨준 채 시장의 노예로 사는 일을 수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타이와 말레이시아 민중들은 미국과의 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남미에서는 FTA에 대항해 민중무역협정과 같은 것을 추진하고 있다. FTA가 대세라고 주장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와 같은 신종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FTA 체제가 낳는 민주주의 부정의 결과는 예상이 아니라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한 일이다. 국회에서 비준을 받아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FTA 협정을 폐기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덧붙임
* 이 글을 작성하는 데 오동석,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 한미FTA ‘타결’과 그 이후」(인권단체연석회의, ‘한미FTA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 토론회, 2007. 4. 23.)를 주로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