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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악이 ‘시민불복종’을 정당화한다

[인권문헌읽기] 시민불복종의 고전들

시민불복종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합법성보다는 정의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노암 촘스키의 글이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불복종 운동에 대하여 1967년 당시 뉴욕타임스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십여 명이 넘는 학자와 저술가들에게 ‘무엇이 불복종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글은 그중 노암 촘스키의 답변이다. 본문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말한 부분을 생략하고 번역했다. 베트남전을 오늘의 우리 상황으로 바꿔놓고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5, 6월 뜨겁게 펼쳐지고 있는 불복종의 잔치에 시민불복종의 원조들을 초대해보려 한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연행하겠다는 경찰 앞에서 “그래 날 잡아가라”고 전경버스에 오른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에 헌신하는 사람은 기쁘게 투옥을 감내해야 한다는 간디가 박수를 보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등장하여 자유발언을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합니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박수)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십시오.” (함성)
“오늘날 이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요? 나는 대답합니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입니다.” (옳소)(옳소)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십시오. 단지 한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십시오.” (환호)
(더 자세한 내용은 ‘도서출판 이레’의 『시민의 불복종』 참조)

다음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길거리 토론에 나선다. (대답 내용은 비폭력 시위를 벌인 혐의로 킹 목사가 구속됐을 때, 감옥에서 데모를 비방한 동료 목사들의 성명서를 접하고 이를 반박해 쓴 ‘버밍햄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발췌해 구성했다.)

* 왜 다른 의사 표현 방법도 많은데 꼭 데모를 해야 하는 거지요?

“왜 직접행동이냐고요? 왜 연좌데모를 하는 거냐고요? 협상이 더 나은 방도가 아니냐고요? 이러한 그대들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입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의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오. … 더욱 나은 발전을 위해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은 필요한 것입니다. … 우리의 직접행동의 목표는 위기의식을 조장시켜 협상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협상을 주장하는 그대들의 의견과 나의 생각은 조금도 다를 바 없소.”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이제 막 시작한 정부 아닙니까? 좀 기다리고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민권의 그 어느 한 부분도 압력을 가하지 않고서는 쟁취할 수 없었음을 인식해야할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특권층이 그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일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없었소. … 우리는 피나는 경험을 통해 자유라는 것은 압박자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피억압자가 강력히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 그런데 수 년 동안 ‘기다리라!’는 말만 들어왔소. 이 ‘기다리라’는 말은 항상 ‘결코 안된다!’라는 뜻으로 쓰여왔습니다. ‘지나치게 오래토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다’라는 어느 저명한 법관의 말이 생각납니다.”

* 불복종하려는 사람들의 편의대로 법을 골라가며 지키고 안 지키고 하면 법질서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법은 지키고 어떤 법은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법에는 공정한 법과 불공정한 악법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러한 질문의 답변이 될 것입니다. 나는 솔직히 공정한 법을 지키는데 제1인자가 되고 싶습니다. 공정한 법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책임감뿐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감 때문에도 꼭 지켜야 합니다. 반대로 악법에 복종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책임감까지 있어야 합니다. … 양심의 명령에 따라 악법이므로 복종하지 않겠다는 사람, 그래서 악법이 조장하는 불법에 도전하여 사회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감옥의 형벌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람은 실제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법을 존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시위대의 행동이 폭력사태를 초래한 것 아닌가요? 경찰만 나무랄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행동이 비록 평화적이었다 할지라도 폭력 사태를 재촉시켰으므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강도사건이 났을 경우 돈을 지니고 다닌 것이 강도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므로 피해자를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폭력사태를 초래할까봐 억누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마땅히 강도에게 벌을 주고 피해자는 보호해야 합니다.”

* 시위대 속에는 순수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 극단론자가 배후조종을 하고 있지 않나요?

“극단론자냐 아니냐보다는 어떤 종류의 극단론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증오를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부정을 유지하기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정의의 연장을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 아마 전 세계는 창조적인 극단론자가 지독히 필요할 것입니다.”

* 한 달이 넘어가는데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곧 사그라들겠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일어나 흑백의 자리를 구분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피로하지 않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나의 두 다리는 지쳤지만 나의 영혼은 편안하다’고 말한 몽고메리에 사는 72살의 노파. 그 노파로 상징되는 늙고 핍박받고 찌든 흑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악이 ‘시민불복종’을 정당화한다 (노암 촘스키, 1967 뉴욕타임스)

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상 그것은 도덕적 필수물이다- 의견불일치가 포기돼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 아무리 “자국의 이익”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힘센 국가가 엄청난 고통과 파괴를 강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시민불복종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악이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당국에 언제나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디엔가 선이 그어져야만 한다. 그 선 너머에 시민불복종이 있다. 시민불복종은 아주 수동적으로 정부가 주도한 폭력에 참여하는 걸 단지 거부하는 것일 수 있다. … 시민불복종은 전쟁을 만들어내는 기구에 상징적으로 맞서는 것일 수도 있다. 참여자들이 정부의 무력에 맞서 입장을 고수하고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을 때 그러한 상징적 대결은 시민불복종이 된다. 시민불복종은 상징적 행동을 넘어서서 전진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시민불복종의 한도는 대결하고 있는 악의 정도와 전략적 유효성과 도덕 원칙으로 결정돼야 한다. 원칙과 전략에 근거하여, 나는 시민불복종이 철저히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면상 이에 대한 근거와 결론에 대한 토론을 할 수는 없다.

제기된 마지막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미국의 정책을 방어하는 자들은 막연하게 공산주의의 “공격”을 말한다. 정확하게 언제 그런 “공격”이 있었던가? … 모두가 아는 것을 기술하려 하지 않겠다. 미국이 행한 바를 말하려고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폭력과 우리의 도덕적 겁으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다, 시민불복종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장을 끝내려는 노력 속에서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극단의 도덕적 스펙트럼에서 따온 두 개의 인용구(각각은 매우 진실이다)로 마치겠다.
(1) “자연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고, 그 국가가 민주주의건, 파시스트 독재이건, 의회이건, 공산주의 독재이건 간에, 언제나 인민을 끌고 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다. 목소리를 내건 침묵하건, 인민은 언제나 지도자들의 분부대로 하게끔 끌려갈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인민들에게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 침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국심이 부족하며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평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작동한다.”
(2) “정의롭지 못한 법률과 관행이 살아남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복종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그렇게 한다. 악이 지속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첫 번째 인용구는 헤르만 괴링(히틀러의 심복이었던 나치장교)의 것이다. 시민불복종을 권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이 나라에서 “똑같이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은 에이 제이 무스떼(평화운동가)가 간디에 부연한 것이다. 이들의 말이 오늘날만큼 더 적절한 적은 없었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